<디스타임 목회칼럼> 익숙과 성숙 | 이기형 | 2024-05-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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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과 성숙 어떤 일에 처음 나서서 일이 서투른 사람을 초보, 신참내기라 합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답답한 속도로 모든 규칙을 지키면서 주행하는 자동차를 만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동차 뒷 유리에는 어김없이 ‘초보운전,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누구나 초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잔뜩 긴장해서 핸들을 잡은 손에 땀이 촉촉했던 시절 말입니다. 지금도 그렇냐구요? 이제는 운전하면서 딴전도 피울만큼 익숙해졌습니다. 자신감이 붙은 겁니다. 자신도 초보 그 답답한 시절이 있었음에도 앞에 운전하는 초보를 못 견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동안의 경험은 초보를 익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운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눈을 감고서도 운전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심지어 술을 마시고서도 핸들을 잡으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살인행위인데도 익숙함에 자신하는 것입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식당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도 합니다. 3년까지 아니더라도 습관 바꾸는데 21일이 필요하고 행동이 습관으로 자리잡는데 66일 걸린다는 보고서도 있습니다. 두 달 정도면 충분히 익숙해 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일단 버릇이 되고 습관이 되면 익숙해지고, 익숙하면 힘들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편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익숙함에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있습니다. 습관적이 되다보니 어쩌면 무의미한 기계적인 반복처럼 생각없이 살아갑니다. 힘들이지 않고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만 새로움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변화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익숙해진 환경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익숙함을 전통이라고 자랑스럽게 지켜가려 합니다. 오래되어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 변화나 새로움을 꾀하지 않아 나태하게 굳어진 습성을 타성(惰性) 매너리즘(Mannerism)이라 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신자, 얼마나 어리숙한지요. 그들의 기도를 듣다보면 웃음이 나오고, 성경에 대한 무지에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교회와 복음에 무지하기에 호기심도 있고 배워보려는 탐구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은 반복이기에 몇 달 다녀보면 금새 배워서 익숙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성당개 3년이면 주기도문을 외우고 교회개 3년이면 심방도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신앙이 익숙해지면 이제는 유창하게 기도할 수도 있고 남들 하는대로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연륜이 쌓이다보면 그것을 전통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 문화를 교리처럼 신봉하게 됩니다. 절대 교회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익숙함이 아니라 성숙함입니다.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고 말씀하십니다. 익숙함이나 성숙함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지만 같지 않습니다. 익숙함은 주변 환경에 대한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적응이지만 성숙함은 본질에 대한 나 자신의 적응과 변화입니다. 익숙에는 더 이상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만 성숙의 길에는 끝없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혹시 나는 익숙함을 성숙함으로 착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내가 익숙해진 교회 문화를 마치 진리인양 고집하면서 나의 만족을 위해 공동체를 좌우하고 있진 않습니까? 익숙함의 고집을 성숙함의 신념이라고 합리화하진 않는지 돌이켜 볼 일입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성숙해지도록 끊임없이 발버둥치면 좋겠습니다. 늘 그렇고 그런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고 깊어지는 삶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익숙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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