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타임 목회칼럼> 훈수와 선수 | 이기형 | 2024-05-09 | |||
|
|||||
훈수와 선수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나단은 다윗이 성전 건축을 열망할 때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 보려준 준 참으로 영안이 밝은 선지자였습니다. 왕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윗과는 달리 선지자는 백성들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니 백성들의 동향과 형편을 전해들을 수도 있어서 다윗에게는 기대되는 만남입니다.
선지자는 다윗에게 성에 살고 있는 두 사람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는데, 부자는 소와 양이 셀 수 없을만큼 많이 있지만,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작은 암양 새끼 하나 뿐이었답니다. 그뿐이니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요. 그 암양은 가축이라기 보다는 딸과도 같아서 함께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그 품에 누웠다네요.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왔는데, 부자가 자기의 그 많은 소와 양은 아끼고 가난한 집의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하였다고 선지자가 전해 주었습니다.
공분, 누가 들어도 분노할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윗도 자기가 다스리는 성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났기에 분노하며 펄쩍 뛰었습니다. 그 부자 놈은 당연히 죽여야 한다고,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한 가난한 자에게는 네 배로 갚아주어야 한다고 판결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펄쩍 뛰는 다윗을 보면서 “사돈 남 말하네.”라며 비웃을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추악한 일을 대놓고 하진 못했고 은밀히 행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한 짓이니 다윗 자신이 모를리 없고,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고, 또한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지금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부자나 다윗이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윗만 그걸 모릅니다. 다윗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행한 일에 극노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고 슬픈 일인지, 그래서 웃픈 일인가요.
사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한계이자 연약함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자기를 볼 수 없기에 내로남불 이중잣대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엔 참견하고 훈수를 둘 수 있습니다. 자기 문제가 아니기에 자기 이익에서 벗어나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문제가 되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능력을 자기 객관화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 시절엔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 중심적이지만 성장하면서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혀 가면서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배려하는 삶에서 평화가 나오지만, 자기가 옳고 타인을 자기에 맞추려 할 때 갈등과 분열이 싹틉니다.
이렇게 쉬운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누구나 타인의 갈등과 분열의 현장에서 중재자가 될 수 있고 문제 해결자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면 다를 겁니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이겨야 하니까요. 승리를 어떻게 타협할 수 있나요? 승리하지 않으면 패배만 있을 뿐입니다.
자기를 바라볼 수 있으려면 그 현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이야길 하지 않고 다른 동네 이야기, 성읍에 있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실화였는지 아님 선지자의 꾸며낸 이야기였는지는 모르지만, 다윗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기에 불의한 부자에 대해 분노합니다. 당사자가 아니라 훈수를 두는 사람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집니다. 선지자는 그 사건을 다윗에게도 가져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의 가르침이 그것 아닐까요? 성경의 가르침이 그것 아닐까요? 성경은 책속에 문자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인물은 오늘 우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만 모르고 다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는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다른 어떤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기형목사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