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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타임 목회칼럼> 나부터, 나도, 나라도 | 이기형 | 2023-01-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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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나도, 나라도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불만스러운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이야 원래 그렇다치고 거룩해야 하는 교회와 서로 사랑한다는 성도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실망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고, 아무리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해도 성도들이 도무지 달라지지 않아 낙담하는 목회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구요, 그러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목회자들의 소망일텐데 그리스도인들도 잘 바뀌지 않으니 세상은 더욱이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경구를 남겼다는데 생각대로 안되니 사는대로 생각하고 되는대로 살아야 할까요? 변화의 대상과 시발점이 틀렸다고 현자들이 지적해 줍니다. 웨스터민스터 묘지에 있는 성공회 주교의 묘비에 있는 글이라고도 하고, 이슬람 지도자였던 바야지드 바스타미의 기도문이라고도 하고, 나스룻딘의 글이라도 하는데, 암튼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중년이 되었을 때는 내 친구들과 가족들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이 된 지금 나는 나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합니다. 만약 처음부터 이 기도를 드렸다면 아마 내 인생은 훨씬 달라졌을 것입니다. 변화의 시작은 ‘너’가 아니라 ‘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내가 기준이니까 세상이 거기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그 기준에 맞추는 겁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해달별이 움직인다는 생각을 버리고 태양이 중심이라는 것을 발견했듯이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혁이 필요하지만 그게 맞는거 아닙니까? 변화의 대상이 ‘나’라면 거기에 몇 가지 조사를 달리 붙여 봅니다. 먼저는 ‘나부터’입니다. 그는 개척자 선구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하지 않으니 군중심리에 동조되어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먼저 나서면 돌이라도 맞을 수 있으니 서로 눈치만 보고 굳이 타겟이 되지 않으려 합니다. 역사는 개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길이없다고 아우성이지만 길을 만들고 길이 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먼저 나서보십시오. 어쩌면 외롭고 고달플지 모르지만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는 ‘나도’입니다. 그는 동역자 협력자입니다. 나서지도 않으면서 남의 장단에 춤추지 않겠다고 하는 비협조가 많이 있습니다. 남의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시기심도 은연중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이 시대 사람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눅 7:32)고 한탄하셨는데 아무리 좋은 일이라해도 동참하는 협력자들이 없으면 그 일은 이루어질리 없습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데 작은 힘을 보태 주세요. 마지막으로 ‘나라도’입니다. 그는 순교자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고 외면하는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이고 희생의 길이겠지요. 모두가 자기의 이익과 욕심만을 좇아 갑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약해지고 무너집니다. 아무도 가지 않겠다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지만 한 사람이라도 용기를 내서 세대를 거스릴 수만 있다면, 그 물줄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면 역사는 그를 기억할 겁니다. 남은 자, 모두가 그렇게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은 최후의 보루, 그가 오늘날 필요합니다.
나 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 존재지만, 거기로부터 변화는 시작됩니다. 시인이자 경주성경침례교회 담임목사인 조동화 님의 시 ‘나하나 꽃 피어’를 소개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나로부터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다른 방식으로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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