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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타임 목회칼럼> 베데스다의 오징어 게임 | 이기형 | 2021-11-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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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의 오징어 게임 베데스다는 히브리어인데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참 은혜로운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못이 있는데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누가 얼마나 나았는지, 그게 사실인지 과장된 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적어도 희망을 가질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종합 병원같이 많은 환자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만병통치, 아무리 죽을 병도 나을 수 있다는데 불치의 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인 셈이지요. 각양 각색의 환우들이 몰려들어 동병상련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측은히 여기며 오순도순 지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천대를 받아도 여기서만큼은 서로가 아껴주고 살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 보시면 그게 은혜롭습니까?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까? 자, 갑자기 연못에 파장이 일어납니다. 순간 은혜의 집은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연못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게 아니기에, 두 번째 들어가도 소용없으니 오직 첫 번째 사람이 되기 위해 밀치고 당기고 짓밟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로지 가장 먼저 들어간 한 사람,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세계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승자가 될까요? 덜 아프고 더 건강한 사람이겠지요. 가장 배려를 받아야 할 중환자는 여기서도 치이고 밀려서 언제나 뒷전입니다. 여기서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38년을 허비한 환우가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못에 들어갈 수 없는 중환자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자기 갈 길이 급한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38년이 또 흘러도 이 사람은 고침받을 가망성이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베데스다, 무슨 병에 걸렸어도 고침받을 수 있다는 그 은혜의 자리라 해도 이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왜 자리를 박차고 떠나지 못하고 38년을 허비했을까요? 그나마, 여긴 고침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희망고문이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더 이상 붙들 것이 없었을테니 애써 외면했겠지요.
있지도 않은 희망을 부여잡고 언젠가 터질 대박을 기대하면서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요, 언젠가 내가 먼저 못에 들어가기만 하면 고침받고 행복한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거라고 꿈을 꿉니다. 참 불쌍한 인생입니다. 은혜의 집 안에 살지만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머물수도 떠날수도 없기에 스스로를 속이면서 허송하고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 벼랑 끝에 떠밀려 온 사람들이 어짜피 죽을 목숨인데 실날같은 희망에 도박을 겁니다. 어짜피 인생은 한방 아닌가요? 그 한방만 있으면 인생 대박난다는 거지요. 베데스다의 연장선에 오징어게임의 참가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살기위해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간 곳이라면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을까요? 그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일 수 있을까요?
어릴 적 친구들과 놀던 골목놀이에는 함께 살아가는 우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지으신 세상도 어린양과 사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승자독식의 오징어게임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베데스다 은혜의 집에 참된 은혜를 가져다주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환우에게 묻습니다. “낫기를 원하시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
참된 구원과 행복은 베데스다와 같은 오징어게임에 있지 않습니다. 설령 거기서 다른 환자들을 제치고 무좀을 고침받았다 할지라도 그 인생은 별반 달라질게 없습니다. 아마 456억을 거머쥐었다해도 크게 나아지진 않을 겁니다. 베데스다의 부질없는 희망고문을 포기하시고 손내미시는 예수님을 만나 보십시오. 거기에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이기형목사 (캘거리 하늘가족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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