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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타임 목회칼럼>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구요? | 이기형 | 2021-05-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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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에 교민신문 디스타임(https://thistime.ca)에 기고한 목회 칼럼입니다. 소나기가 내리면 피해가면 되고, 예측할 수 있는 역경과 고난은 돌아가면 되고.. 그런게 세상 살아가는 지혜라고들 합니다. 무모하게 나서는 만용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계산적인 판단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영악하다는 뒷소리를 듣는다해도 그게 부러워서 하는 심술이 아니겠습니까? 하룻 강아지가 철이 없어서 범 무서운줄 모르지요.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게 평탄한 길일까요? 호랑이를 잡는 익사이팅한 스릴과 쾌감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무미건조한 삶이라면, 큰소리 칠 수 있는 근거를 들어 보세요.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구요?> 하룻 강아지는 ‘하릅 강아지’로부터 변형된 것인데 한 살된 강아지를 뜻한답니다. 한 살된 강아지는 경험이 많지 않기에 철 없고 세상 물정 몰라서 천방지축 까불고 겁 없이 짖어댈 나이입니다. 그러다보니 주제파악 못하고 감히 상대할 수 없는 호랑이에게도 함부러 덤비는 것입니다. 용기는 가상하지요. 기개는 칭찬할만 합니다. 그러나 용기와 자신감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능력이 안되는 도전은 너무 무모하기도 합니다. 하룻 강아지는 호랑이를 못이기지만, 강아지가 10년쯤 수련하면 호랑이를 잡을 수 있을까요? 팬더가 쿵푸를 단련하여 무림의 고수가 되듯이, 개도 훈련하면 호랑이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진돗개나 풍산개는 호랑이를 잡았다니 그게 불가능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혹시 한 두 마리 진돗개가 호랑이를 잡았다 한들, 그건 기적같은 일이지 일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찬란한 성공 신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 할 수 있다고, 요옹기를 가지고 노오력을 더 하라고, 남들은 할 수 있는데 왜 그걸 못하냐고 다그치며 부축이지만, 그건 특별한 경험을 일반화하는 오류인 겁니다. 개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습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경험하며 알아갈수록 아는 것은, 결국 모른다는 것이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섣불리 어설프게 알고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설레발을 치지만, 진리의 한 조각을 붙들고 전부인양 호들갑을 떨지만, 그 깊은 세상으로 들어갈수록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알게 됩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은 정말 그렇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이 겸손이면 좋겠습니다만, 우리는 현실을 알아가면서 서글프게도 꿈은 닳아지고 왜소해지며 소박해집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계산할 줄 알면서 무모한 도전은 시도하지 않습니다. 의욕도 도전도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인생이 뭐 있나요? 그냥 그렇게 적당하게 사는거지. 굳이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나 열정을 잃어버리고 쉽고 편한 길에 익숙해지는 겁니다. 그럼에도 강아지가 호랑이 앞에 과감하게 나선다면 박수라도 쳐 주시겠습니까? 그런 소년이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양을 치면서 막대기 들고 곰이나 사자를 쫓아냈다고 자기가 제법 대단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감히 겁도 없이 거대한 난공불락의 요새같은 골리앗 앞에 나서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까요. 아니 누군 모욕과 멸시가 들리지 않아서 가만 있었겠습니까?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한건데, 저 철없는 꼬마는 망토 하나 둘렀다고 자기가 슈퍼맨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게 얼마나 꼴사나운지 자기 형인 엘리압이 훈계해 보지만 들은체도 않습니다. 사울도 만류해 보지만 자신만만해 합니다. 예,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다윗이라는 소년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결말도 잘 아시지요? 그건 ‘다윗’이니까 이긴 것일까요? 비록 작은 소년이라도 물매라는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길 수 있었을까요? 평소에 양을 치면서 갈고 닦은 실력이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한 것일까요? 강아지가 10년을 도 닦으면 호랑이도 잡을 수 있다는 말씀일까요? 그렇게 알고 계신다면 다윗과 골리앗을 ‘전래 동화’로 알고 계시는 겁니다. 성경을 보시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다윗의 무기는 물매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다윗의 물매는 빗나갈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물매를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시키신 것입니다. 하룻강아지라도 호랑이 앞에 나설 수 있는 것은 겁을 상실해서가 아니라 뒤에 든든한 명사수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데서 그치지 말고, 그 분의 크심을 아는데까지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대단한 그 분이 나를 통해 일하시니까요. 이기형목사(캘거리하늘가족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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