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 홈 >
  • 하늘가족양식 >
  • 설교말씀
설교말씀
250720(주)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겁니까?(계 3:19-20) 이기형 목사 2025-07-20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4

http://gajok.onmam.com/bbs/bbsView/5/6545981

[성경본문] 요한계시록3:19-20절 개역개정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5년 7월 20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250720(주일예배)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겁니까?(계 3:19-20) 사랑의 표현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신다고 하신다. 성경의 유익을 4가지로 알려 주는데, 곧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함이다. 위로나 격려나 축복이나 그런 것을 말씀하진 않으신다. 그건 책망의 결과요 열매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잠 3:12). 그러므로 징계를 받는 자가 복된 자라 하신다(욥 5:17) 그럼 여러분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신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있는데, 귀에 달콤하면 ‘아멘’하지만 귀에 거스리면 노멘하는 것이 보통 신자들일 것이다. 신앙의 성숙함은 책망과 징계를 은혜로 여기며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시 141:5). 아무쪼록 책망과 징계를 사랑으로 여기는 성숙한, 성숙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럼 주님의 책망은 무엇인가? 1. 열심을 내라 여기 열심은 세상 일에 열심이 아니라 지난주 설교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열심을 말한다. 여러분 중에 ‘지금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 싶은 생각이 든다면, 오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붙드시면 좋겠다. 내 삶에서 믿음의 열심이 사라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그 이유를 살펴보려 한다. 1. 부자들 - 부족함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셔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이미 가진게 많고 부족함이 없는데 열심을 낼 이유가 있을까?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할 까닭이 있을까? 누리고 즐기며 살기에도 모자라다면 굳이 믿음의 열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잠언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한다(잠 27:7).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성도들도 하나님은 없어도 괜찮으니 축복만 달라고 아우성이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부요해지면 열심이 사라진다. 이것은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앞두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경고이기도 했다(신 8:13-14). 그럼 하나님께서도 그를 부자라 인정하실까? 사람들 보기에 부자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사람이다. 결국 부족함이 없는 부요가 그래서 열정이 없어도 되는 풍요가, 그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와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 2. 보통 사람들 - 적당하게 살기에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주님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말씀하신다. 오늘날처럼 극우나 극좌같이 극단적인 세상에서 중용의 길을 걸으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일 수 있다. 적당하다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정도에 알맞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서 적당히 하라는 의미는 ‘요령으로 엇비슷하게만 하라’든지, ‘임시변통으로 대충하다’는 뜻이 있다. 신앙에도 너무 빠져드는 사람을 광신자라 한다. 믿어도 적당하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발을 다 신앙에 들여놓으면 빠져 나올 수 없는거 아닌가.. 그래서 한쪽 발은 믿음에 들여 놓았지만 다른 한 쪽 발은 세상에 여전히 있다. 언제라도 발 빼게. 스스로 한계를 정해 놓았기에 어떤 바운더리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박쥐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양쪽 세상에 속했다고 대견해할지 모르지만 정작 양쪽 세상은 박쥐를 자기 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하늘가족 여러분, 적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주님은 그를 토하여 버리겠다 하신다. 3. 낙심과 절망으로 인해 열심이 사라진 삶의 또 다른 이유는 낙심과 절망으로 인해서이다. 불의 선지자 능력의 종 엘리야도 좌절과 낙심이 찾아오자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죽기를 간청하고 있다. 어떤 개체가 부정적인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에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기대한대로 어떤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낙심이 된다. 해봤자 소용도 없는데 뭣 때문에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하나 싶은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지 열정이 사라졌다면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무슨 음성인가? 2. 회개하라 회개하라 하심은 열심을 잃어버린 것이 죄라는 것을 전제한다. 부자라 부족함이 없어 열심을 잃어버렸든지, 적당하게 살기 위해 열정을 잃어버렸든지, 낙심 가운데 의욕을 잃어버렸든지 간에 열심을 잃어버린 것은 죄이기에 회개하라 하신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앞서 말씀하신대로 가난하고 헐벗었음에도 부자라고 교만했던거, 적당하게 안주하면서 양다리 걸치며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다 가지려 욕심 부린거. 낙심 가운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주저앉아 있는거... 주님은 그를 찾아오신다. 범죄한 인생을 찾아오시는 것이 은혜이다. 생각해 보라. 자기는 부자여서 부족함이 없으니 하나님도 필요없다고 내핑개친 인생에게, 하나님은 뭐 아쉽다고 찾아오시는가?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자기 이익따라 오락가락하면서 여차하면 하나님도 버릴 수 있는 기회주의자에게, 하나님은 뭐가 아쉽다고 찾아오시는가? 아무런 댓가가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실망과 낙심 가운데서 하소연하는 무능한 인생이, 어디 쓸모있다고 하나님은 찾아오실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이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거 하나 잊지 못해서 사랑을 구걸하듯이 오히려 간절함으로 찾아오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무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찾아오시는데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다. 언제까지나 문이 열릴 때까지 서서 기다리신다. 문을 여실 능력이 없는것도 아닌데,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하시면서도 기다리신다. 주님이 여러분의 문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셨는가? 안들리는게 아니라 귀를 막고 안듣는건 아닌가? 그것을 고집이라 한다. 구름이 햇살을 가리듯이 내 고집이 주님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어서 늘 그렇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삶이 늘 그렇고 그런 삶이 아니라, 무기력한 건조한 삶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먹고 즐기는 그렇게 활력 넘치는 삶이 되시면 좋겠다. 주님으로 인해 기쁨의 잔치하는 삶이 되시면 좋겠다. 마무리. 마음의 문을 열라 그 첫 단추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겠다 하신다. 먹거리는 내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문을 열기만 하면 풍성한 양식은 주님 준비하셨다. 주님의 준비하신 것으로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열정을 잃어버렸다면, 주님의 주시는 풍성함을 맛보아 보라. 그러면 내 가진 것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 것이 없는 것이었는지를 알게될 것이다. 적당하게 세상과 양다리를 걸치면서 오락가락하기에 세상의 즐거움도 하나님의 은혜도 다 놓치고 살아간다면 헛똑똑이 아닌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순 없는데, 주님을 붙잡으라. 그리하면 주님의 더하여 주시는 은혜를 넘치도록 누릴 것이다. 낙심과 좌절로 열심은 얼음처럼 식어지고 나만의 깊은 동굴에 숨어 은신하고 있는가? 그 자기 연민을 회개하라. 주님을 외면하고 자기 멋대로 살았던 교만도 회개하라. 그리고 밖에서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라. 나 아니면 열 수 없는 나의 마음의 문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 문을 열지, 아니면 못들은체 하고 계속 외면할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자유의지이다.  

부디 간곡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맞이하심으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잔치의 기쁨이 풍성하시기를, 그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50727(주) 입술에서 마음으로 (마 15:7-9) 운영자 2025.07.29 1 15
다음글 250713(주일예배) 모든 것을 더해 받는 비결 (마 6:33) 운영자 2025.07.26 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