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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3(주) 비 준비 하시니 (시 147:1-12) 이기형 목사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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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147:1-12절 개역개정

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2.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3.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4.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5.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7.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8.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9.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10.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2.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비 준비하시니(147:1-12)

할렐루야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고, 아멘은 진실로 그렇게 될지어다 그런 의미이다.

할렐루야를 말에게 교육시켜서 출발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할렐루야 축구단, 할렐루야 여행사. 할렐루야 헤어샵 등 상호에 할렐루야를 사용하는 것은 또 어떤가?

할렐루야를 아멘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할까?

1절 말씀에 찬송은 선하고 아름다울뿐 아니라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당연하고 마땅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러다보니 습관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많이 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하지만 정작 마음에 감동이나 감격도 없고 감사도 없이 그냥 하는 말이라면 그건 구호이고 주문이고 공염불일 뿐이다.

예배에 찬양이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께 온전히 찬양드린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만남이 없는데 그에게 은혜가 임할리는 만무하다.

우리 예배의 찬양에 온 마음 다해 온 목소리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시고, 하나님과의 만남에 감동과 감격이 있는 참된 할렐루야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는 시편 147편의 말씀을 통해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찾아보려고 한다.

 

1. 찬양할 이유 - 회복(1-6)

찬양할 이유, 첫 번째 연에서는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2절의 예루살렘을 세우신다는 말씀은 무너졌음을 전제로 한다.

주전 587년 유다가 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은 무너져 폐허가 되었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세우실 뿐 아니라, 포로로 끌려가 온 세상에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셨다.

3절의 상심한 자들"은 문자적으로 마음이 깨져서 조각난 자들을이라는 의미.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에게는 충격이었다.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해 멸망당한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으로 인해 깨진 마음은 무엇으로도 수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상한 마음을 고치신다(1:1). 그리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신다(30:26, 6:1).

우리도 때로 무너짐을 경험하고 흩어짐을 당할 때가 있다.

나의 삶에서도 공든 탑도 무너지고, 내면의 질서도 무너지고, 희망찬 기대가 무너지기도 하고, 그렇게 친밀했던 관계가 깨어질 때 우리는 낙심과 무력감을 느낀다.

산산히 깨지고 허무하게 흩어져 남은 것이 하나없는 밑바닥을 경험하기도 한다. 절망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때이다.

하나님은 무너진 성을 세우시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신다. 상심한 마음을 고치시고 상처를 싸매 주신다.

정말 정작 나의 무너짐을 돌아보시고 나의 깨진 마음을 고치시며 싸매 주실까? 실감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은 별을 통해 시청각 교육을 하신다.

별들의 수를 세실 뿐 아니라 그 이름대로 불러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별과 같이 허다하고 흩어져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 찾아내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80억 지구촌 사람들의 이름을 아시고 하나 하나 부르신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서 인도하신다(10:2-3).

5절 말씀처럼,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지혜가 무궁하시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간 능력자들도 많아서 그 앞에 주눅들기 쉽고, 위대한 스트롱 맨들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어서 어지럽기만 한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꺾으신다. 위대하고 능력이 많고 지혜자라고 교만하게 자랑하는 그들을 힘과 권력과 자랑할 수 없도록 땅에 엎드러뜨리신다고 하신다.

역전의 하나님 앞에는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겸손으로 설 수 있다.

힘을 가질수록 더욱 겸손해야 할 이유이다.

겸손은 자기비하나 열등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붙드심으로 하나님의 회복케 하시는 은총을 힙입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2. 찬양할 이유 - 돌봄(7-11)

1연의 회복이 지나간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라면, 2연의 돌봄은 현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시인은 멀리 자연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돌봄을 보여준다.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는 것을 비를 준비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비를 내리게 하심으로 산에는 풀이 자라게 하시고 나아가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도 살아가게 하신다.

들짐승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야생동물을 의미하고, ‘까마귀 새끼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하다고 여겨 꺼림의 대상이 되며, 심지어 어미에게까지도 버림을 받는 존재이다.

하찮은 산의 풀들과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야생의 동물들, 그리고 버림받고 부정한 까마귀 새끼까지도 하나님은 돌보아 주신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 가운데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셨다.

그것을 보여주신 목적은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다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고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다(6:26-32).

어쩔 수 없이 현실주의자로 살 수 밖에 없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더욱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들의 풀과 들짐승, 버림받은 까마귀 새끼도 돌보시는데 하물며 자녀된 우리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실줄 믿으시기 바란다. 이것이 믿음이다.

본문 말씀에 구름이 일고 비가 오며 풀이 자라고 들짐승들과 까마귀가 살아가는 자연 현상은 누구나 동일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사람마다 다르다.

시인은 자연현상, 그러니까 스스로 그렇게 되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그가하신 일이라고 하나님의 섭리를 노래한다.

하나님이 구름을 덮어 비를 준비하신다고? 과학적으로 비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높은 곳에서 찬 기운을 만나 엉겨 맺혀서 땅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찬양과 감사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믿는다면, 그건 믿음으로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다.

 

그럼 각기 믿는대로 살면 그만인가? 2연에서도 역전의 하나님이 나타나는데, 10-11절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과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나온다.

믿을 것은 자기 밖에 없다고 힘쎈 군마를 갖추고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 힘을 키우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에게는 소망이 없다.

왜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힌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군사적 능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뼈에 사무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힘이 없어 무너지고 흩어진 것이 아니라고,

그건 피상적인 관찰일 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무너진 것이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누구나 느낀다.

쉽지 않다면 뭐가 부족하고 모자라서인가? 힘과 권력이 없어서, 돈과 재산이 없어서인가...

어쩌면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닐까.

어떻게 세상을 믿음으로 사느냐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무리

세 번째 연(12-20)이 남았는데, 다음에 보기로 하고, 오늘 할렐루야 시편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찾아 보았다.

1연과 2연을 통해 2가지 찬양의 이유를 말씀드렸는데, 회복과 돌봄이었다.

하나님은 무너지고 흩어진 자들, 마음 상하고 상처입은 자들을 고치시며 회복케 하신다.

하나님은 들의 풀과 들짐승들, 그리고 까마귀 새끼도 돌보아 주신다.

자연만물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섭리에 의해 한치 오차없이 돌아간다.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실 때가 있다. 그러면 온 세상이 어둡고 캄캄해지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어둡고 불안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비를 내려 주시려고 구름으로 덮는다. 내 삶의 구름은 은혜의 표징이며 축복의 예약이다.

만물도 주관하시는데 하물며 아들을 대신하여 얻은 당신의 자녀들이겠는가?

회복하시고 치유하시는 은혜와 돌보시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 함께 찬양드리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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