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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주) 아, 조국이여(느 1:1-5) 이기형 목사 202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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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느헤미야1:1-5절 개역개정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12월 22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241222(주일예배) 아, 조국이여 (느 1:1-5) 아, 조국이여(느 1:1-5) 국가 위기 상황 앞에 우리는 높아진 우리 조국의 위상을 더욱 피부적으로 실감한다. 그런데 2024년 12월 난데없이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한민국은 1980년 전두환 시대로 회귀하는듯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과거로 회귀하는 타임머신을 가로 막았다는 것이다. 거대한 국민적인 저항 앞에 대통령은 잠시 고개를 숙이는 듯 하더니 입장을 바꾸어 끝까지 싸우겠다고 전쟁을 선포했다. 주권자인 국민과 싸우겠다니, 국가적인 혼란은 불가피하고 앞으로도 더욱 추락할 수도 있겠다는 경각심을 갖게 한다. 무엇이든지 세우기는 어렵지만 허물기는 너무 쉽다. 역사적으로 잘살던 나라가 순식간에 후진국으로 전락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공든 탑도 순식간에 무너진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다. 우리에게서도 그러한 조짐이 보이지 않는가. 조짐은 경고이다. 방치하면 현실이 된다. 더 무너지지 않도록 막아야 하고 서둘러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느헤미야는 누구인가? 무너져 페허가 된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 그는 느헤미야이다.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 무너진 공동체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지 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느헤미야의 이야기는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지 약 14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한 사건을 말하고 있다. ‘느헤미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의 축약형이 '나훔'이다. 느헤미야는 수산궁에 있었다. 이 수산 궁에서 느헤미야의 역할은 왕의 술관원이었다. 술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을 관할하며 술잔을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가 왕께 따르는 왕의 최측근이자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에 맞먹을 정도로 고위 관직이었다고 한다. 느헤미야는 포로민의 후예로 예루살렘에 귀환하지 않고 남아 정착한 디아스포라 2세대였고, 백악관 비서실장 정도 되었으면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으로 탄탄대로가 보장되었을 것이다. 1. 느헤미야의 관심 느헤미야는 수산 궁에 있었고 세상적으로도 성공한 자리에 있었기에 조국의 현실은 그에게 별 관심사가 못되었을 것이다. 멀리 타국의 왕궁에서 잘살던 느헤미야가 가본 적도 없고 말로만 듣던 고국의 현실이 뭐가 그리 중요했겠는가. 그런데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국의 형편을 먼저 묻는다. 관심이 있고 마음이 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국가와 나라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도 버겁고 분주한 사람들에게, 고국을 떠나와 캐나다에 정착한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하늘 시민인 우리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간절히 원한 것은 동족인 이스라엘의 복음화였다 조국은 우리 존재의 기반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그 터전이다. 터전이 흔들리면 그 위에 삶이 안전하고 평안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바울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면서 이는 우리가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플라톤의 경고를 들어보라.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흘러가게 해야 한다. 그 사명을 위해서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우리의 조국에 대해 마음을 두어야 한다. 느헤미야가 들은 소식은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에스라4:23에서 볼 수 있는데,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을 재건하려 했지만 르훔과 심새가 왕권을 통해 방해하면서 환란과 능욕을 당하고 공사하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불탄 것이다. 2. 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는 페르시야 제국의 고관으로서 누리는 현세적 영화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광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민족의 환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자기 자신의 일처럼 고뇌하고 금식하고 기도한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원리이다. 느헤미야가 왕의 술 관원이기에 권력을 동원해서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금식하며 아뢰인다. 민족이 큰 환란을 당하고 능욕올 받으며 성은 허물어졌고 성문들은 불타버렸다는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 나라가 위기 가운데 무너질 수도 있는데,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하는가? 아니, 나는 기도하는가? 내 기도제목이 간절한 것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가? 함께 모이든 안모이든 정말 우리는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라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한다. 그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과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의 기도는 남 탓에 익숙하다. 남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남들이 변화되기를 기도한다.오늘날 교회마저 복음의 논리가 아니라 진영논리에 휘둘리고 분별력을 잃어가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느헤미야는 무엇을 기도하는가?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느헤미야는 범죄 집단을 뭉뚱그려서 말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지목한다. 누구인가? “나와 내 아버지 집이 범죄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디아스포라 이민 2세라면 그는 나라가 망할 때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에는 발을 디딘 적도 없다. 그런 그가 무슨 죄를 지어서 나라가 징벌을 받는단 말인가? 느헤미야의 인식은 그게 아니었다. 나도 그 백성이라는 연대의식, 공동체 의식이 그에게 있었다. 내가 지은 죄가 아니라도 우리가 지은 죄악 속에는 나도 들어있고 나도 공동 운명이기에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나의 죄라는 것이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나는 자유한가? 나는 의로운가? 무거운 책임이 없는가? 범죄에는 주동자와 동조자와 방조자가 있다. 온갖 불의와 불법을 마음놓고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동조자들과 방조자들이 있기에 가능한게 아닌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침묵하고 무관심한 죄, 그 죄가 가져온 참사가 오늘날 이 혼란이 아닌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과 권력을 향해 선지자적인 사명을 포기했다. 대통령이 무속과 미신에 빠져 있어도 교회는 축복하고 안수하고 지지했다. 그럼 교회에 책임이 없는가? 악이 승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선한 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응답 내가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응답도 나에게 온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고 느헤미야는 준비된 대답을 통해 왕에게 성의 재건을 요청한다. 느헤미야는 피상적인 기도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실 때, 존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도록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둔 것이다. 느헤미야는 올바른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응답을 따라 순종하여 행동한 것이다. 기도의 골방은 현실 도피처가 아니다. 거기는 생명을 출산하는 산실이다. 하나님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기에, 기도한 사람은 사명이 따른다. 느헤미야처럼 앞장서서 나서는 응답이 아닐지라도, 오늘 나의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보여주신다. 마무리 바다 건너 닥친 조국의 혼란이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가? 그래서 슬퍼하며 울고 금식하며 기도하는가? 그게 누구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 때문이라는 인식으로 통회 자복하는가? 주동자는 아니었을지라도 때로 동조하기도 하고 방관하기도 했기에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닌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침묵하고 무관심한 죄, 그 죄가 가져온 참사가 오늘날 이 혼란이 아닌가? 내가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응답도 나에게 온다. 기도의 골방에 도피할게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에 반응하여 순종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는다면 반드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 나를 통해 대한민국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우리를 통해 그런 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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