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21(주) 복과 화를 제대로 압시다 (눅 6:20-26 | 이기형 목사 | 2024-07-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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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6:20-26절 개역개정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복과 화를 제대로 압시다(눅 6:20-26) 정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에게는 복을 구하고 화를 피하려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복이 무엇인지 화가 무엇인지 철학적인 정의를 모른다해도 본능적으로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면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박해받는 자가 복있는 자인가? 여러분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사람들에게 그건 복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가난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는게 아닐까 싶다. 가난을 죄악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많은 경우 복은커녕 불행과 고통과 좌절을 가져다 준다. 주린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도 동의하기 어렵다. 복은 무슨, 주린 자는 배부를 것이 아니라 굶어죽을 수 있다. 우는 자는 더욱 무시를 당하고 깊은 좌절에 떨어질 수 있다. 미움받고 따돌림 받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 것인데 그것이 복일리 없다. 아마 예수님이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같고, 설령 예수님 당시는 복일지 몰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부요와 힘을 자랑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다간 실패자 낙오자 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요한 자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부자를 잘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가난한 사람은 못사는 사람이라 불렀다. 잘살고 못사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도덕과 양심의 문제일텐데도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잘 사는 사람, 복을 받은 사람으로 여겼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복 받은 증거는 부와 재물이 아닌가?(잠 8:21)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있는 사람은, 주린 자가 아니라 배부른 자이다. 복있는 사람은 잘 먹고 사는 사람들, 먹고 배부른 자들이다. 흔히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것을 행복이라 생각하지 않던가. 하나님께서도 그 백성을 가나안에 이끄셔서 배부르고 잘 살게 하실거라 약속하셨다(신 8:12). 배부른게 복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있는 사람은, 우는 자가 아니라 웃는 자이다. 우는 자와 웃는 자, 누가 복 있는 자인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사 61:3).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있는 사람은, 미움 받는 사람이 아니라 칭찬받는 사람이다. 미움 받고 욕 먹고 버림받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열방 가운데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습 3:20).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을 주님은 화라고 하십니다. 놀랍고 충격적인 말씀은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주님은 화가 있을거라 하신다.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복이라는 것이 부요하고 배부르고 즐겁게 웃고 칭찬받는 것일진대, 주님은 그것이 복이 아니라 화, 재앙이라고 말씀하신다. 부요한 자가 화가 있을 것은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 하신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 부요는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없을만큼 강력한 능력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걸로 끝이라고, 이미 다 받았다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하신다. 주님은 정말 위로가 필요한 때에 위로를 받을 수 없을거라 하시는데, 그것이 재앙이라 하신다. 배부른 자가 화가 있을 것은 이제 주리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다. 죽음 이 후에도 진수성찬이 필요할까? 제사상에 진수성찬을 차려도 죽은 영혼이 그 음식을 먹을리 없다. 하루만 산다면 몰라도 모든 인생에게 영혼이 있어 영원을 누릴텐데 이 땅의 육신이 배부른 자는 이제 그 영혼이 주리게 될 것이다. 웃는 자가 화가 있을 것은 애통하며 울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웃을 수 있을까? 웃음 뒤에 감추어진 슬픔을 지혜자 솔로몬은 지적해 낸다(잠 14:13). 요한계시록을 보면 주님의 다시 오심이 부요한 권력자들에게는 애통과 통곡의 시간이 되리라 하신다(계 18:7). 모든 사람의 칭찬이 화가 있을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그와 같았기 때문이다. 의인의 칭찬이 있지만 악인의 칭찬도 있는데, 악인의 칭찬을 받으려면 악과 타협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러했다. 악인의 칭찬을 좋아할 것이 아니라 재앙으로 여기고 우리의 행실을 돌이켜야 할 것이다. 무엇이 참된 복일까? 이렇듯 주님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인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과 칭찬이 화가 있을거라 하시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도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을 받아도 그것이 진정한 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 본문은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주님께서 복이 있다고 하신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와 미움받는 자는 단지 세상의 재물이 없어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어 주리고, 갖지 못한 것으로 울고, 자신의 그릇된 처신으로 미움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복은 하나님 말고 의지할 데가 없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있다. 가난에 눌려 좌절하고 절망하는 자를 복되다고 하진 않는다. 가진 것이 많고 부요해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고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그 역시 가난한 자라 하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단순히 재산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적인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마 5:3,4,6,10). 감히 가난도 주림도 애통도 박해도 복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을 주시기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배부름을 주시기에,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실 것이기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에게 천국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시대 복음은 이 풍요로움이 아닌가 싶다. 그것을 번영신학이라 한다. 하나님이 복주셔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겠냐는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갈망한다. 그래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 하나님을 찾는가? 그보다는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과 칭찬을 누리기에 분주하다. 그러면 복이 재앙으로 바뀐다. 풍요가 곧 재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독소, 위험한 인자가 숨어 있다. 그것은 번성하고 풍부하게 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먹고살기 바빠서든지, 살만해서 놀기 바빠서든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체가 최대의 재앙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 최대의 적은 부요와 형통, 편함과 안락일지 모른다. 배부른 자의 재앙은 무엇인가? 이제 주리게 될 것이라. 사람들은 그것을 풍요 속에 빈곤이라 한다. 갈망이 없으니 기도하지 않는다. 열정이 없으니 움직이지 않는다. 굳이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얼마든지 부요하게 살아갈 수 있기 떄문이다. 기도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삶이라면 그것이 축복일까? 정말 축복이겠는가? 그래서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주린 자, 우는 자,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다. 진정한 복은 욕망을 채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진정한 복인줄 믿는다. 마무리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시대를 보면서 애통함이 없다. 뭐라도 해서 대항하고 바꾸어야 한다는 거룩한 강박감도 없다. 그럴 열정도 없다. 그저 순응한다.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는데, 어쩌면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환경과 형편대로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깨어 우리의 심령을 잠들게 하고 무감각하게 하는 세상의 가치와 싸워야 하고, 맞서야 하고 대항해야 한다. 1975년 시인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다.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에 생수를 찾듯이 영적 기갈이 심각한 시대에 하나님 한분이면 족하다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을 회복하시면 좋겠다. 부족함이 없기에 놀고 먹는 소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족함이 없게 하신 이유는 전심으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사모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도시에 이루어 가려는 목마름과 열망을 가진 참으로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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