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14(주) 썰물의 시간에 붙들어야 할 것(시 43:1-5) | 이기형 목사 | 2024-07-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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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43:1-5절 개역개정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2024년 7월 14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240714(주일예배) 썰물의 시간에 붙들어야 할 것 (시 43:1-5) 썰물의 시간에 붙들어야 할 것(시 43:1-5) 썰물의 시간에 해변 뿐 아니라 인생에도 밀물과 썰물이 있다(전 7:14). 썰물에는 몇가지 특징들이 있는거 같다. 첫째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이 큰 영향을 끼친다. 둘째는,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인데, 뭐든지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셋째는, 썰물은 한꺼번에 찾아온다. 썰물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데, 그렇게 찾아낸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혹시 여러분 중에 썰물의 시간을 경험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 주시는 말씀이 고난중에 위로가 되는 힘과 능력이 되시기를 축복한다(시 119:50). 1. 시인의 썰물 우리는 1절의 시인의 간구를 보면 어떤 어려운 문제를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공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판결을 부탁하고, 나아가 자기를 위해 변호하시는 하나님께 법정 소송을 부탁한다. ‘감히 하나님께 판단해 달라고? 그렇게 자신 있는거야?’ 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시인은 그만큼 억울하고 답답함이 있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감찰하시고 결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손해 당하지 않도록 정확하게 판결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시인은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가? 그 내용은 나와 있지 않고 어려움을 주는 상대방이 나오는데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알 수 있다. 그 상대는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들이다. 그리고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이다. 국가 권력과 같은 거대한 세력이 간사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시인을 괴롭히고 있다. 누구라도 감당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 시인의 탄식 그래서 시인은 탄식한다(2절). 먼저 하나님께 대한 탄식은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앞서 1절에 하나님께서 약자의 재판장이 되어 주시고 의로운 자의 변호인이 되어 주시길 간구하고 기대하였다. 그런 줄 알았는데, 힘이 되어 주실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거 같다. 버렸다는 말은 굉장히 강한 표현인데, 강한 혐오감 내지는 역겨움을 반영하는 말이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자기의 보호와 피난처가 되신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야 이런 어려움을 겪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주님은 어딜 가든지(수 1:9) 끝날까지(마 28:20)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은 더욱 상처가 크고 아픔이 있는 것이다. 때론 우리도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진정 살아 계시고 나의 판단자이며 변호인이고 힘이시며 구원이시라면 어떻게 내 삶이 이다지도 참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에 대해서도 탄식하는데,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슬프게’는 탁류처럼 '흙탕물이 된'(욥 6:16), 더럽고 먼지가 낀듯한(욥 30:28) 등의 의미가 있다. 그 담대한 믿음은 어디가고 어둡고 처량하게 코가 빠져 있나.. 자신을 보아도 한심한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심경을 5절에서는 두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낙심과 불안이다. 낙심은 슬픔의 무게로 인해 가라앉은 심히 우울한 상태를 그려주는가 하면, 불안은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거나 가라앉는 바다의 파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46:3) 성난 파도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요동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감정도 때로는 깊은 좌절 가운데 짓눌리기도 하고, 사나운 풍랑으로 인해 요동치는 것처럼 격동하기도 한다. 3. 시인의 회복 시인은 하나님께서 날 버리셨다고 그렇게 탄식하며 낙심과 불안 가운데 마냥 머물고 있는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거 같은 환경에 있지만, 그래서 낙심이 되고 불안하지만 그는 자기 영혼을 향하여 왜 낙심하며 불안해 하느냐며 도전한다(5절).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 고통스러울지라도 스스로 낙담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하는 결심이다. 사실 그가 낙심했던 이유는 자기 자신과 환경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떠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환경이나 자신을 보지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자기 영혼을 향해 명령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 하나님께 소망을 둔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한다(3절). 시인은 스스로는 낙심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으니 하나님께서 빛과 진리를 보내셔서 자기를 인도해 달라는 것이다.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찬송가 375장) 정말 어디가야 좋을지 모른다. 그래서 방황한다. 하나님의 빛과 진리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특별히 어디로 인도해 달라는 것인가? 주의 거룩한 산, 주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는 이제 환경을 통해 굴절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길 원한다. 나의 삶이 형통할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삶이 막히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인식은 이기적인 나의 생각일 뿐이다. 시인은 과거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어두움에 가려있는 그의 길을 빛으로 비추어 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제단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주께서 빛과 진리로 거룩한 성전에 인도해 주시기만 하면,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겠다고 고백한다(4절). 하나님께서 주의 전에 이끌어 주셨으면 이제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는 것은 시인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세상의 모든 문제는 풀려지게 되어 있다. 시편 73편에는 이 세상의 풀리지 않은 문제, 곧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가 해답을 얻은 곳은 성소였다(시 73:16-17).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대면하시는, 곧 귀로 듣는게 아니라 눈으로 직접 대면하시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이제 5절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예배자의 찬송이 나온다 시인이 탄식할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셨다고 버리셨다고 절규하지만, 이제 성전의 시은소에 나아갈 때 그의 고백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찬송한다.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인의 찬송이 또한 우리의 찬송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마무리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썰물의 시간에 있는 분이 계시는가? 자신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떠나셨다고 생각되며 슬픔과 낙심으로 불안할 수 밖에 없지만, 주의 성산에 장막에 그리고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 하나님만 소망할 때 그는 다시금 기쁨과 찬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제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한다.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문제의 해결자이신 주님만 바라보시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본 시편에는 시인의 상황에 진전되었거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바뀌었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처음 불안과 탄식에서 시작했지만 기쁨과 찬양으로 마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만 바라볼 때 그의 삶이 바뀌게 될 것이다.아무쪼록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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