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9(주) 생명의 가치와 자본의 가치(막 5:16-17) | 이기형 목사 | 2024-06-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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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5:16-17절 개역개정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생명의 가치와 자본의 가치(막 5:16-17)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기사이다. 이 스토리가 성경이고 진리니까 거부감 없이 믿는다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은 있을 수 있다. 왜 예수님께서 귀신의 요청에 허락하셨을까? 돼지도 생명이 귀한데, 예수님도 유대인이라 돼지를 싫어하셨을까? 예수님은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면 몰살당할지 아셨을까? 그럼 그 주인이 감당해야 하는 물질적인 피해는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귀신들린 한 사람 살리자고 2천마리 돼지 떼를 죽이시는 것은 너무하신거 아닌가? 꼭 그래야 했나? 저는 그 답에 대해 오늘 설교로 말씀드리려 한다. 예수님은 왜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을까? 먼저, 예수께서 고의로 돼지떼를 몰살시킨 것은 아니다. 귀신들이 그렇게 간청한 것이고 예수님은 허락했을 뿐이다. 예수께 직접적인 원인이 있는게 아니다. 귀신이 그 지방을 떠나지 않고 차라리 돼지떼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은 왜 그럴까? 누가의 기록에는 다르게 나와 있는데, 귀신이 무저갱에 들어가라 하지 말기를 간청한다. 그러니까 귀신도 자기들이 들어갈 곳을 알고 있다. 무저갱이다.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깊은 장소를 뜻하는 블랙 홀이다. 무저갱에 갇히면 귀신들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된다. 지금 귀신은 예수께서 나오라 하셨으니 나올 수 밖에 없는데, 무저갱만 아니면 돼지떼라도 좋겠다는 말이다. 이런 귀신들의 생각을 주님께서 아셨음에도 귀신의 요구를 허락하신 것은 귀신에게 순종하심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사탄과 귀신을 심판하실 때가 있는데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마 8: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온 귀신이 갈 곳을 정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머물 사람을 찾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기 위해 두루 다녔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 귀신들이 자기들에게 오지 않고 돼지 떼에 들어간 것을 감사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사람들에게 가시적인 확신을 주시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귀신의 지배 아래 살던 그 사람에게 이제 귀신이 완전히 자신에게서 떠났으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돼지 떼의 몰살로 확신시켜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귀신들려 옷을 벗고 무덤가에 살며 사납게 괴성을 지르며 자학하던 괴물같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돼지떼 2천마리를 희생시키신 것이다. 적어도 자기는 돼지떼 2천마리보다 귀한 존재인 셈이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었다. 그는 주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었다. 귀신 들린 사람의 치유에 대한 거라사 사람들의 반응 사람이 돼지보다 귀하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물론 그럴 것이다. 여러분들의 돼지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여러분의 돼지여도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여기 돼지의 주인이었던 거라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목격자들이 이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누구신지 곧 귀신에게 고통당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사람, 한 사람을 2천마리 돼지떼보다 사랑하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 예수가 누군지를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 자기들의 동네에서 떠나기를 간구하였다. 그러니까 추방한 셈이다. 메시야 구세주, 생명의 주님을 영접이 아니라 거부와 추방이라니 이들은 왜 그럴까? 그들에게 귀신 들린 자는 애시당초 지워버린 없는 존재였다. 그 사람이 없어도, 아니 그 사람이 없어서 잘 살아왔는데, 그깟 쓸모없는 사람 하나 살리자고 돼지 2천마리를 몰살시키는 것이 말이 되냐고 분노하고 있다. 주님은 사람이 돼지보다 귀하다고 하지만 이들은 돼지가 사람보다 귀하다고 말한다. 거라사 사람들의 눈에는 살아난 한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10억이 보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주세주가 아니라 자기들을 망하게 하는 파괴자로 보였던 것이다. 돼지가 몰살한 것은 사탄과 귀신이 관장하던 이교 문화가 예수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거라사 사람들이 본 것은 그저 엄청난 손해뿐이었다.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면 도시 주변 곳곳에 수많은 돼지들이 있는데 그 돼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옳고 좋고 바람직한 것을 판단하는 관점을 가치관이라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계관이라 한다. 예수님의 가치관은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생명의 가치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어떤 조건도 없이 자체로 귀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관은 돈이 제일이라는 자본의 가치이다. 생명의 가치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있다. 몸값에 있다.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 몸 값이 다르다. 하찮은 몸값도 있고, 천문학적인 몸값도 있다. 거라사의 사람들은 귀신이 들어와 한 사람을 망가뜨려도 자기들의 돈이 안전하다면 아무 문제없다. 지워버리고 없는 셈 치면 되니까. 그러나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아도 자기들의 돈에 손해가 된다면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군대 귀신이 돼지들에게 들어가 몰사했지만, 여전히 거라사의 사람들 안에는 맘몬 귀신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와 형통을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아버릴 수 있는 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세상이다. 그 세상의 논리를 따라 그렇게 살아가시겠는가? 귀신의 속박에서 구원을 누리는 것보다, 거짓된 우상숭배에 영혼을 팔아넘긴 댓가로 얻은 부요와 쾌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편을 택하시겠는가? 저나 여러분이나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을 꿈꾼다. 하나님의 나라, 맘몬이 자본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모든 판단의 기준이 돈이 되어버린 돌아버린 세상에서, 사람도 돈으로 평가받는 미친 세상에서, 돈 때문에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기도 하고, 돼지고기 값보다 못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세상에서 저항하며 도전하면서 하나님의 시각과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한다. 우리는 귀신들렸다 고침받은 사람을 남의 이야기로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듣기 때문이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데가볼리의 거라사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간다. 로마의 법칙과 가치, 거짓된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그 댓가로 풍요와 자본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방의 갈릴리 거라사. 귀신에 사로잡혀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은 거라사 사람들에게는 지워버린 없는 존재였다. 그는 몸값으로 치자면 값이 없는 쓸모없는 인생, 스스로도 알기에 돌로 자해하며 살아가는 소망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주님은 그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저물어 가지만 제자들에게 배를 띄우라 하시고 폭풍이는 바다를 목숨걸고 건너가셔서 그 사람을 만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다. 왜? 간단하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니까. 2천마리 돼지 떼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그 사람을 구원해 내신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보다 더 귀한 생명 값을 치루셨다. 그래서 나도 돼지보다 사람이 귀하다는 생명의 가치로 살아가야 한다. 자본이 제일이라는 자본주의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 첫번째가 무엇인가? 찾는 이 중심 주님께서 거라사의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기에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겠다. 그럼 여러분은 그 귀신들린 한 사람을 위해 목숨걸고 그 바다를 건너겠는가?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겠는가? 거라사의 사람들은 ‘아니오’를 선택한다. 거라사 사람들은 자기들이 귀신들린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같은 사람들이었다. 차이는 군대귀신 들린 사람은 고침을 받았지만, 거라사의 사람들은 맘몬에 사로잡혀 고침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거라사에 살지만 자본의 가치에 도전하며 생명의 가치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 그 한 사람 살리려고 제자들로 죽음의 바다를 건너가게 하시고 그 한 사람 살리려고 2천마리 돼지를 죽음으로 몰아 넣다니... 이 문장이 의문이 퀘스천이 아니라 감탄의 느낌표로 살아간다. 그 한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생명의 가치로 살아가려고 힘쓴다. 그 고백이 여러분의 진실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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