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2(주)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서 | 이기형 목사 | 2024-06-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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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5:1-5절 개역개정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서(막 5:1-5) 2024년 첫 천만관객을 돌파한 영화 [파묘]의 장재현 감독은 오컬트 특화형 감독이란 평을 받지만 그는 기독교 집사라고 한다. 그가 만든 영화 ‘검은 사제들(2015)’은 구마 의식을 하는 가톨릭 신부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감독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거라사 귀신 들린 사람 이야기를 모티프로 제작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 5:1-20, 누가복음 8:26-39, 공관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어딘가는 그런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겠지만,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어서 그렇게 실감나거나 피부적으로 와 닿진 않는다. 어쩌면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는 별개의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들은 격리되어 있거나 수용되어 있어서 우리에게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지, 본문의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찾아가 보자.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 예수께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하자 귀신 들린 사람이 나와 예수를 영접했다. 여기 귀신(프뉴마티)은 다양한 뜻을 갖고 있는데, 숨, 바람, 영(spirit), 귀신, 성령(the Holy Spirit)등이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고 그래서 생령,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영으로 지음받은 이 사람에게 어느 날 더럽고 악한 영이 들어와 자리잡게 되었다. 그것도 한 두 귀신이 아니라 군대 귀신이었다. 그 날 이후로 이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옷을 입지 않고 집에 거하지도 않았다. 그는 옷을 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거하였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공간이지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살아 있지만 정작 죽은 자와 같다는 의미이다. 살아있는 세상과 관계맺지 못하고,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고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괴성을 지르면서 파괴적이고 자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귀신 들린 사람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최고급 모피코트를 걸치면서 나는 부자라고 부요한 것이 없다고 자랑을 늘어놓고 있지만 그러나 실상은 벌거벗고 있다고 지적한다. 어떤 사람들은 대저택에서 초호화 빌라에서 살아가지만, 그 화려함과는 다르게 실상은 무덤만도 못한 고독과 죽음의 장소일 수도 있다. 건강한 자아의식이 아니라 파괴적인 자의식, 때로는 하늘을 찌르는 교만으로, 때로는 깊은 동굴에 숨어버리는 열등감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세상을 주름잡으려 하지만 결국은 파멸로 끝을 맺는다. 사람들의 교양과 경제가 나아지면서 세상이 온화하고 따뜻해지는가? 아니다. 세상은 점점 사나워지고 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실상은 얼마나 폭력적인 야만의 세상이 되어가는지, 공평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사명을 가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폭력과 무력을 정당화한다. 어쩌면 우리 살아가는 세상도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동네 사람들의 도움 이 사람은 본래 그 도시 사람이었으니 가족이 있었을 것이고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 평범한 사람이었다. 군대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의 삶을 살아갈 때 처음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도우려 했을 것이다. 그 도움이라는 것이 쇠사슬로 묶어 두는 것이었다. 그것은 귀신 들린 사람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서였다. 한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고 감금하는 것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무능함을 우리도 절감한다. 그나마도 대책이 되지 못했다. 이 귀신 들린 사람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고랑과 쇠사슬을 여러번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해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결국은 산 사람들의 사회에서 추방하고 격리하여 죽은 자들의 세상인 무덤으로 내쫓았던 것이다. 죽은 셈 치고 없는 셈 치고, 귀신 들린 사람의 고통은 어쩔 수 없더라도 나라도 살아야지.. 내 눈 앞에서 사라지면 고민도 가책도 없이 고통받는 그와는 상관없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우리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야박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우리는 독하게 마음먹고 각자도생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예수님의 도우심 이렇게 대책없는 거라사에 예수님께서 다가 가신다. 예수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다가, 날이 저물자 바다를 건너가자 하신다. 성경은 이 갈릴리 동편지역을 데가볼리라 하는데, 성경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칭하였다(마 4:15) 그러니까 이방 땅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셨는데 거기가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후에 즉각 다시 본래 장소로 돌아오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신 이유와 목적은 오로지 이 한 사람 이방땅 거라사의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만나시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해 속수무책이라, 외면하고 격리해서 자기들의 눈 앞에서 치워 버리고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 고통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고, 없는 셈 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예수님의 귀에는 그 고통의 부르짖음이 들리고, 예수님의 눈에 처절한 인생이 눈에 밟혀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물 때, 이제는 하던 일도 마치고 안식하는 그 시간에 예수님은 배를 띄우라 하신다. 바다는 건너는데,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가득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이었지만, 이들은 죽음의 공포에 아우성치고 있다. 그렇게 사지를 뚫고 그 저물 때 바다를 건너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는가? 이유를 찾자면 오로지 그 한 사람, 이방의 귀신들린 그 한 사람을 위해서였다. 주님은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제자들의 목숨을 건다. 왜 그렇게 제자들을 데려가셨을까? 제자들의 눈으로 봐야 하니까. 같은 도시에 살아도 거라사 사람들의 눈에는 더 이상 귀신들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과 다른 세상을 살아가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는 보인다. 그리고 제자들의 눈에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같은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함께 한다고, 이론과 지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으로 데려가신다. 엔도 슈사쿠의 대표작 ‘침묵’의 기념비에 “인간은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푸릅니다”라고 적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리도 슬픈데, 주님의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데, 너무도 푸른 바다의 잔잔함에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도 괜찮을 것일까. 주님은 그 바다를 건너 건너편 딴 세상으로 가자고 배를 띄우시고 우리를 제촉하신다. 주님 앞서 가시고 함께 가자 하실 때, 그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마무리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너무도 잔잔하고 푸르른 바다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무너진 인생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내 눈에는 안보이고 내 귀에는 그 신음이 들리지 않는다. 나의 세상에서 격리하고 추방했으니까, 같은 세상을 살아가도 그들은 없는 존재인 셈이다. 속수무책,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복음이라는 방법을 갖고있긴 한데, 그 복음이 그들을 살릴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확신이 없으니 사용하길 주저한다. 나에게 확신이 있어도, 상대가 필요를 느끼지 않는거 같다. 그들은 예수 믿지 않고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가려진 아픔과 고통, 숨겨진 진실을 보지 못하기에 그들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 밟히고 주님의 귀에는 그들의 고통의 소리가 들린다. 우리를 향해 맞은편 바다로 건너가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배에 함께 하시겠는가? 우리는 속수무책이지만, 아픔 많은 이 슬픈 세상에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인줄 믿는다. 그 진리가 먼저 나의 삶에서 드러나면 좋겠고,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에서도 예수 복음의 생명이 드러나면 좋겠다. 잃어버린 한 생명을 찾아가시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주님처럼, 오늘 찾는이 중심이라고 예배마다 선포하는 우리 하늘가족교회에서도 한 영혼을 찾는 열정이 뜨겁게 살아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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