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7(주)답정너 크리스챤(렘 42:5-6 ) | 이기형 목사 | 2024-04-07 | |||
|
|||||
[성경본문] 예레미야42:5-6절 개역개정5.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6.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답정너 크리스챤(렘 42:5-6) 교회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 목사가 은혜 안되는 설교를 하는지, 아니면 성도가 마음을 닫고 귀를 막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은혜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그 영혼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말씀을 들은 성도들에게 영적인 생명력이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 목회자들도 환멸과 절망을 느끼곤 한다. 어떻게 해야 설교가 은혜와 보람이 될 수 있을까? 은혜는 주는 것인가? 은혜를 끼친다는 표현을 하는데, 그 은혜는 누가 주는 것일까? 은혜는 받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1. 은혜는 말씀에 순종할 때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 5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겠다고 다짐한다. 6절 말씀은 그렇게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복이 있을거라고 고백한다. 본문의 말씀에서 보면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은혜 받았다는 것을 마음의 감동, 그러니까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럼 감동은 언제 오는가? 감동을 뒤집으면 동감인데, 나를 알아주거나 내 생각에 동의해 줄 때이다. 나에게 감동을 주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 어떤 초월적인 힘이 나를 사로잡아 변화되지 않고서 견딜 수 없는 그런 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능력의 하나님은 나를 조작하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존중하신다. 종교적이고 열광적인 체험을 은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종교 경험이지 온전한 은혜가 아니다. 인격적인 나의 반응, 곧 의지적인 결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감동을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예배의 자리에 있기보다 영화나 드라마나 감동적인 쇼를 보는 것이 낫다. 은혜는 말씀대로 행하겠다는,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이다. 그런데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맡기는 것을 우리는 순종이라 한다. 그렇게 온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2.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한다. 여기 5절 말씀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보내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전한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사람의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 바르트는 설교를 '하나님을 말한다'고 했다. 어떻게 말하는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게 한다. 여기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목사는 진실하고 성실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동시에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여기고서 온전히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설교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성도들을 위해서도 유익하다. 에스겔 선지자를 찾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하면서 에스겔에게 찾아왔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 그런데 말씀을 듣겠다고 찾아오긴 했지만 말씀대로 행하진 않았다.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했고, 또한 에스겔을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라 고운 음성으로 노래하는 자, 혹은 음악 연주자로 여겼던 것이다. 오늘날 예배가 엔터테인먼트가 되고 설교를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 심사하고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을 지금 나의 삶의 현장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면 좋겠다. 3.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좋든 좋지 않든 순종해야 한다. 6.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흔히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 하지 않던가. 사람들은 앞서 에스겔에게 보였던 태도처럼 이익이 되면 순종하지만 손해가 될거 같으면 불순종한다. 나의 생각이나 경험 지식에 맞으면 받아들이지만, 내 생각과 다르면 거부한다. 그러나 내 소견에 옳은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복종시켜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힘겨울 때도 있다. 그런데 좋든 좋지않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되게 해 주실 것이다. 그것이 은혜이다. 마무리. 답정너 크리스챤 오늘 본문을 조금 넓혀 바라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에스겔 당시 시대적 상황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바벨론은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한다. 유다의 왕족 이스마엘 일당이 반역을 일으켜 총독 그다랴를 살해하고 남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암몬으로 떠난다(렘41:10). 귀족 요하난이 이스마엘 일당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유대인들을 되찾아 유다 남쪽 베들레헴에 머문다. 왜 미스바로 돌아가지 않고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돌렸을까? 이들은 남방의 강대국 애굽으로 가려 했던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총독이 살해당하고 반란이 일어났으니 바벨론이 가만 있을리 없기 떄문이다. 그나마 애굽으로 가면 안전할거 같았다. 요하난과 백성들이 애굽으로 가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찾아와 자신들이 마땅히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물어봐 달라고 부탁한다.여기가 본문 말씀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 막론하고 순종하겠노라 고백한다(렘42:6) 그러면 정말 그렇게 순종하려 했을까? 에스겔 선지자는 미스바로 돌아가 바벨론의 통치를 받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다. 바벨론의 손길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이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애시당초 자기들의 정해놓은 생각이 있었고, 그것이 대한 승인과 지지를 기대했을 뿐이다. 남쪽 베들레헴에 와서 이제 애굽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미 마음은 애굽에 가 있었지만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다.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좋든 좋지않든 순종하겠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지만, 입술에 그친 접대멘트였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애굽의 힘을 더 믿었다. 요하난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답정너’였을 뿐이다. 답정너란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그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이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고 하나님이 경고하신대로 애굽으로 쳐들어온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고 좋든 좋지 않든 순종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내심 스스로 답을 다 정해놓고 말씀을 듣거나 기도할 때가 있다. 설교자가 자기 원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듣지 않고 은혜가 안된다고 마음을 닫고,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해야 은혜가 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감동을 받는대해도 은혜일리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답정너가 아니라 주인이시다. 주인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이 은혜이다. 그 은혜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G M T Y 음성 기능은 200자로 제한됨 : :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