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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주) 전도자 빌립-와서 보라 (요 1:45-46) 이기형 목사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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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1:45-46절 개역개정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전도자 빌립-와서 보라(1:45-46)

 

** 세 마리 개 이야기

캐나다는 전체 가구의 41%, 한국은 25%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두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이 개의 이름은 선입견''편견'이다.

편견(Bias)이라는 개한쪽만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기울어진 시선으로 바라보니 사고도 기울어져 있고 판단도 기울어져 있다.

선입견(Prejudice)이라는 개는 자신의 살아온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만큼 무의식적이고 강력한데, '똥고집(고정관념)'이란 별명을 가진다.

선입견과 편견은 사회적 약자를 향하기도 한다.

성경에서도 여성이나 장애인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비하하던 용어들이 많이 교정되었다.

1961년 번역한 개역한글 성경에는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불구자, 벙어리 심지어 병신까지 등장했는데,

1998년 번역한 개역 개정은 이런 용어들을 맹인, 못걷는자. 나병환자, 못듣는자, 말 못하는자, 장애인, 몸 불편한자 등으로 다 바꾸어 번역했다.

용어 하나에도 편견과 선입견이 스미어 있기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교육이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누구나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욱 강화된다.

사람은 보고 싶은것만 보고, 보고 싶은대로 보기(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 때문이다.

선택적 정보와 정보의 왜곡으로 인해 세상은 더욱 더 극단적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편견이나 선입견을 잘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한데, 캐나다의 이력서에는 사진이나 성별이나 나이를 인종 장애, 결혼 등을 기재하지 않는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잘 관리하기 위해 꼭 입양해야 하는 다른 개가 있다. 무슨 견()이겠는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이 개는 자기 눈으로 확인하거나 몸소 체험하지 않으면 어떤 것에도 휘말리지 않는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이며 지나간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늘 현재를 살아간다.

그래서 오랜 세월 반려견으로 친근한 편견과 선입견은 이제 거리를 두고,

새롭게 분양받은 백문불여일견을 더욱 가까이 하시면 더욱 온전한 삶이 되실 것이다.

 

** 전도자 빌립

이제 이 세 마리의 개 이야기를 성경에서 풀어보려고 한다.

오늘 말씀드릴 전도자는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다.

빌립은 공관복음에는 이름만 나오는데 요한복음에는 부르심부터 그의 행적이 자세히 나온다.

안드레와 요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예수님은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부르신다.

빌립은 안드레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고 한다.

빌립은 예수를 어떻게 믿고 있는가? 45절 말씀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에 기록된 그 사람,

곧 빌립은 예수가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야임을 확신하고 있다.

 

1) 빌립의 전도 -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를 만났을 때,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안드레는 예수를 따르고 처음으로 한 일은 자기의 가장 가까운 형제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도하는 것이었다.

여기 빌립도 예수를 따르고 처음으로 한 일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구약성경에 기록한 그 사람,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하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여기 나다나엘이 공관복음에서 바돌로매로 기록된 예수님의 제자라고 본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여인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서 처음으로 한 일은 내가 그리스도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하는 일이었고, 사람들은 그 증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왔다.

이들은 성령충만하고 권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도의 방법론을 훈련받은 것도 아니고 전도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성령충만하지 않아도, 전도훈련을 받지 않아도 처음으로 한 일은 전도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극히 제한적인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자기 간증이었다.

당시에 이 말 한마디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와 관심이 없는 오늘날내가 예수를 만났다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오늘날 기독교는 그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호감도 신뢰도 사라져가고 있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기독교, 호감이 있고 신뢰를 주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시면 좋겠다.

 

2) 빌립의 전도 - 와서 보라

안드레가 형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며 예수께 이끌자 시몬은 순순히 예수께 나아왔다.

그럼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는데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전할 때 나다나엘도 순순히 빌립을 따라 나섰는가?

나다나엘은 우리가 앞서 말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진 보통 사람이었다.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묻는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 그 촌구석에서 무슨 인물이 날 수 있느냐는 비아냥이다.

당시 갈릴리 지역은 무시와 천대를 받던 지역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나사렛은 요셉과 마리아가 애굽에서 돌아와 헤롯을 피해 숨어살만큼 작은 동네였다.

나다나엘 역시 가나 출신인데, 가나 역시 작은 동네였다.

내가 가나에서 지내봐서 아는데, 가나나 나사렛 같은 동네에서는 메시야가 나올 수 없어.’

그의 어설픈 경험인 선입관과 편견이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기독교에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어, 작은 교회에 뭐 좋은게 있겠어, 좋으면 사람들이 몰려들었겠지.

내가 작은 교회 다녀봐서 아는데, 힘들어, 신앙 생활을 하려면 그래도 큰 교회로 가야지...

 

그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향한 우리의 처방은 무엇인가?

백문이불여일견. 남이 하는 이야기, 떠돌아 다니는 정보에 의존하지 말고 직접 보고 경험하라.

빌립은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도전한다.

와서 보라!’ 이것이 전도가 될 수 있을까? 우리교회 한번 와봐!’ 이것도 전도일까?

예수님께서 안드레와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빌립도 와서 보라고 도전했다.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와서 보라고 도전했다.

그렇다면 대단한 전도 이론을 배우고 전도 훈련을 거치지 않았어도 우리는 전도할 수 있다.

우리교회 한번 와봐그러면 대다수는 바빠서, 나중에 시간나면 갈께그 정도 립서비스를 할거다.

그것만으로 그 영혼이 한걸음 주님께 가까이 온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손길 한번도 주님은 잊지않고 상주실 것이다.

우리가 와서 보라는 이 단순한 한 마디가 전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말이 여기 와서 사람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되시기에 여기 와서 그 예수를 만나라는 초대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남들에게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될지라도, 그리스도가 우리 교회의 머리되심을 믿는다면 그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와서 보라, 와서 만나라,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그것이 전도이다.

 

마무리

2월 한달은 전도자들에 대해 말씀 나누었다.

빌립 집사같은 성령께 붙들린 사람도 있었는데, 그가 한 것은 성령의 이끄심 따라 현장으로 가까이 나아간 것이 전부였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우리는 순종으로 나아가기만하면 된다.

안드레, 그가 예수를 만나고 처음으로 한 일은 그 형제 시몬을 메시야에게로 인도하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너무 좋은 경험을 하였다면 혼자만 간직하는게 아니라 동네방네 소문내고 널리 알린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너도 메시야를 만나면 좋겠다소박한 소망이 안드레의 전도였다.

요나도 어떤가. 그 성의없고 허접한 하룻길 전도를 통해 하나님은 니느웨를 구원하시지 않던가.

우리가 부득불 마지못해 전하더라도 주님은 그 전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더욱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제자 빌립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한마디 전한다.

한 마디지만 그 안에는 얼마나 간절한 열망이 있고, 와서 보기만 하면 달라질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전도, 어렵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빌립집사처럼 가까이 현장에 나아가는 것이고, 안드레처럼 가까운 사람에게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고, 요나처럼 마음이없고 마지못해서라도 전하는 것이고, 제자 빌립처럼 와서 보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2024년도 적어도 이런 전도자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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