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8(주) 진단과 추구4-묵직하라(삼상 2:3) | 이기형 목사 | 2024-01-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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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8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240128(주일예배) 진단과 추구4-묵직하라(삼상 2:3)
우리는 1월 한 달 진단과 추구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듣고 있는데, 스스로의 영적 건강을 진단하고 부족한 부분은 추구함으로 채워가자는 의도이다. 영적 신체검사 항목은 영적인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무게인데, 오늘 다룰 무게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성숙이라 할 수 있겠다. 모든게 묵직한게 좋은게 아니라 가벼워야 좋은 것도 있다. 몸무게, 스포츠 용품, 휴대기기 등 많은 것이 있는데, 무거워야 좋은 것도 있을까? 지갑이나 금고 이런거 말고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신앙은 묵직해야 한다. 왜 그럴까? 1. 하나님은 달아보시는 분이다. 여호와는 전능하신 지식의 하나님이신데,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하신다(삼상 2:3). 마트의 계산대에 저울이 있어 물건을 올려놓고 품목을 지정하면 무게를 측정해서 자동적으로 값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릴 달아보시는 이유도 마찬가지,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하셨는데, 나의 살아온 삶이나 나의 지금 행동을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 놓는다면, 지금 드리는 나의 예배를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 놓는다면 얼마나 나올지 자신할 수 있겠는가?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에 우리의 행동을 무게감있게 살아가시면 좋겠다 하나님은 행동 뿐 아니라 마음도 달아보신다. 잠언 24장 12절에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라고 하신다. 행동이 어떠하든지 그 마음이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는다. 이것은 종교적인 외식과 관련이 있는데, 금식하며 구제하고 기도하는 종교적인 행동은 바리새인을 따라갈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저울질 하셨을 때 그들은 함량 미달이 되었고, 그래서 주님께서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이처럼 마음과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벨사살을 저울에 올리셨다. 그는 말 한마디로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자이다.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인가? 그 존재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인정하셨을까? 하나님께서 한 손가락으로 벽에 그 판결물을 쓰셨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다니엘이 해석하기를, 메네는 왕의 시대를 세었더니 끝났다. 데겔은 끝났으니 저울에 달아 보았는데, 함량미달이었다. 베레스, 왕의 나라를 나누어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보기에는 대단한데 막상 저울대에 올려보면 하찮은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이들을 어떻게 그려주고 있는가? 2. 가벼운 존재들 시편 1편4절에서 악인을 묘사하는데,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신다. 겨가 나오는 장소는 타작 마당인데, 타작 마당은 심판의 장소이다. 겨는 무게가 없기 때문에 조금의 바람에도 날아간다. 곡식을 담아서 까부르면 가벼운 겨와 쭉정이 티끌은 날아가거나 앞에 남고 무거운 것은 뒤로 모여 구분되는데, 이를 ‘키질’이라고 한다. 곡간과 불구덩이로 나뉘는 기준은 무게이다.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가만두면 모르는데 흔들어보면 구분이 된다. 아이들의 찬양중에 흔들어봐요 라는 찬양이 있는데, 참 단순하면서 진리이다. 흔들수록 쭉정이는 밖으로 밖으로 밖으로 흔들수록 알맹이는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시험과 역경이 와서 우리를 흔들 때 쭉정이는 밖으로 밖으로 주님을 떠나지만, 흔들수록 알곡은 안으로 안으로 주님 품으로 찾아든다. 그렇게 묵직하시기를 축복한다. 에베소서에서는 4장 14절에 요동하는 어린 아이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사람의 속임수, 간사한 유혹,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들이다. 누가 영적인 유아인가? 요동하는 사람들이다. 요동한다는 것은 가볍기 때문이다. 무거운 배는 어지간한 파도와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얼마나 사기꾼들이 많이 있고 유혹하는 사탄의 시험이 많은데, 어떻게 요동하지 않을 수 있나? 3. 어떻게 묵직할 수 있을까? 오늘날 시대정신 가운데 하나가 진지함이 아닌 가벼움 인거 같다. 그 나름 장점도 많이 있지만, 믿음은 가벼움이 아니라 묵직함이다. 앞서 악인을 바람에 나는 겨에 비유하였다면 의인은 어떻게 비유하였는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이다. 나무는 한번 심었으면 옮기지 않는다. 자주 옮기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한번 심는 장소가 중요한데, 거기가 시냇가이다. 열매맺는 비결은 간단하다. 시냇가에 심으면 된다. 시냇가에 심는다는 것은 주님 안에,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는 가지가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에 붙어 있는 것이다. 늙어도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려면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뜰 안에 심겨져야 한다. 앞서 가벼운 존재를 요동하는 어린아이 비유를 들었다. 그럼 어린아이처럼 요동하지 않으려면 그 앞절에 나와 있다.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한다. 채워져야 한다. 채움과 비움 어느 것이 중요한가? 비우는 것은 최종 목표가 아니라 채우기 위해 비워야 한다. 그렇게 충만해지면, 그러니까 설교 제목처럼 묵직해지면 그는 요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업 다운이 있다. 나침반이 북쪽을 가르키면서도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런데 워낙 강력한 자성 앞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그리스도로 충만해져서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마무리. 묵직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과 마음을 저울에 달아보신다. 내가 하나님의 저울에 달리면 얼마나 무게감이 있을까? 바벨론의 벨사살 왕을 저울에 달아보고 내린 판결이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다. 벨사살의 시대가 끝나서 저울에 올렸다니 함량미달이었고 그래서 그 나라를 나누겠다. 그는 바람이 나는 겨와 같이, 쭉정이처럼 참으로 가벼운 존재였다. 질소과자같이 허풍이었다. 키질, 까불어보면 안다. 시험과 유혹으로 흔들어보면 안다. 흔들수록 알곡은 안으로 안으로 주님 안으로 찾아오지만, 흔들수록 쭉정이는 밖으로 밖으로 주님 밖으로 떠나간다. 세상 풍조에 요동하지 않으려면 묵직해야 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예수 안에 거해야 열매 맺고, 여호와의 집에 심겨진 나무는 늙어도 결실하고 진액이 마르지 않는다. 중후한 품격은 청년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중년과 노년의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철이 들어야 어른이라 하는데, 철없는 어린아이를 철부지, 철을 모르는 아이라고 한다. 철이 들면 묵직함이 있고 비로소 존재감이 있다. 복음서에는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했다. 열매맺지 않는 나무 존재감이 없다. 신앙의 연륜이 더할수록 빛이 청청하고 진액이 마르지 않고 열매가 풍성해서 알곡으로 묵직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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