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4(주) 진단과 추구2-넓어지라(사 54:2-3) | 이기형 목사 | 2024-01-14 | |||
|
|||||
[성경본문] 이사야54:2-3절 개역개정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진단과 추구2 넓어지라(사 54:2-3) 황희 정승의 이야기가 널리 회자된다. 두 하녀가 다툼을 벌이다 한 하녀가 황정승에게 찾아와 자초지종을 말했다. 정승은 “네 말이 옳구나”고 인정해 주었다. 그러자 다른 하녀가 찾아와 자초지종을 말했다. 정승은 이번에도 “네 말이 옳구나”고 인정해 주었다. 곁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부인 하는 말, “두 사람이 서로 반대 이야기를 하는데 둘이 다 옳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한 사람은 틀려야지요” 그러자 정승이 하는 말, “당신 말도 옳소!” 이게 말이 될까. 황정승은 생각이 없는 것일까? 아님 마음이 약해서 사람을 잃지 않으려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제각기 다른데,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면서 거기 안주하며 살아간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편가르기를 하면서 나와 다른 차이를 틀린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흑백논리 진영논리 가운데 자기 진영은 결속을 강화하고 다른 쪽은 배타와 혐오로 차별하면서 적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악마화하고 악의 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나이들수록 보수적이 되고 확증편향으로 더욱 견고하게 강화된다. 신체뿐 아니라 생각도 유연성을 잃어버리면서 외골수, 고지식한 사람, 요샛 말로는 꼰대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한 이해가 좁을 수 있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야말로 책 한권(성경)의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기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우물안 개구리처럼 편협된 나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 넓어질 수 있고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는 없지만 나만의 세상에 갇혀 살아가서도 안될 것이다. 여호와의 광대하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세상도 지극히 광대하기 때문이며, 그 온 세상에 주의 주되심을 선포하고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가 우리 새해의 소망이 되면 좋겠다. 그렇게 지경을 넓혀가신 세 분의 모델을 소개하려고 한다. 1. 예수 그리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델은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생각을 갖고, 주님의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What Would Jesus Do?)가 우리 삶의 기준이다. 주님은 어떻게 지경을 넓히심을 보여 주셨는가?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성육신(Incarnation)은 놀라운 사건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올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경을 넓혀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소망없이 죄로 인해 망해야 한다. 예수께서 성육신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육신의 원리를 살아내야할지 고민해 보심 좋겠다. 그렇게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행보 역시 파격적이었다. 주님은 제사장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 율법교사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었다(눅 7:34). 거룩한 사람이라면 같이 있기도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 접촉하기조차 꺼려하는 사람들인데,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셨고 교제하셨다. 주님께서 지경을 넓히시고 그들을 찾아가신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은 그들을 고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가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고, 이들이 교회를 찾아오기에도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은 것은 아닌가? 문화 자체를 옳고 그름으로 바라보는 것도 편견일 수 있지만, 설령 그들의 문화가 죄악이라해도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를 만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받아야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게 아닌가. 그래서 그들을 환대하고, 세상 어디서도 받아본 적이 없는 예수의 사랑으로 포용해야 하는거 아닌가. 예수믿고 교회에 오라는 것은 모순 아닌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WWJD) 늘 우리 삶에서 되뇌이고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한다. 2. 베드로 사도행전 10장 고넬료 사건을 통해 베드로를 살펴보자. 베드로는 지금 욥바에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러 있다. 무두장이가 누구인가? 개역성경은 피장이라 했는데, 짐승의 가죽을 이용해서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가죽 제품은 고가에 인기가 있었지만 정작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 백정같이 천대를 받았다. 항상 죽은 동물의 가죽을 다루는 무두장이는 부정한 자로 여겨졌고 유대인 사회에서 천대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의 집에 머물고 있다. 부정한 자와 접촉하면 부정하게 되는데도 굳이 무두장이 시몬을 찾아가 그의 집에 머문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예수님과 오버랩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선을 긋고 벽을 쌓아 끼리끼리 유유상종했지만 예수님은 선을 넘고 벽을 허물어 그들과 함께 하였고 사도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닮아 무두장이 곁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를 확장해 가는 것은 쉽지 않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환상을 보았다. 네 발 가진 짐승,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 유대인의 정결법에 따라 먹을 수 없는 동물들이 담긴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는데, 그것을 잡아 먹으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결코 먹지 않겠다고 거부한다. 우리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보면서 구약의 정결법이나 미쉬나를 넘어서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여기 음식에서는 정결법에 묶여 있는 베드로를 보게 된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깨우침을 주신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지를 생각할 때,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도착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가르쳐 주신다.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던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찾아가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처음으로 한 말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은 위법인데, 하나님께서 속되다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셔서 부름을 사양치 않고 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 유대인의 법과 하나님의 지시하심이 상충되고 있음을 본다. 유대인으로 유대인의 테두리 안에 살았던 베드로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그 선을 넘어선다. 그러할 때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한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편견이 깨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게바 베드로를 책망하였다고 편지에 기록하고 있는데,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고 교제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외식이라고 책망하였다. 그만큼 고정관념의 선을 넘고 벽을 허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복음으로 새로워질 때 우리는 내가 사는 문화와 환경과는 정 반대인 땅 끝에 가서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도 바울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자신이 율법 있는 자이지만 율법없는 자와 같이 되었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 바울이 변장술이 능하고 처세술이 뛰어나서인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 바울의 성육신이었다. 복음을 위한 바울의 확장이었다. 마무리 넓어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확장을 견제하는 이유는 세속화로 여기거나 정복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복음에 물을 타서 거부감없이 받아들일수 있게 한다면 이미 복음이 아니다. 그 본질을 변질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면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우리 읽은 말씀, 장막터를 넓히고 휘장을 널리 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열방을 얻고 사람 살 곳이 되게 하기 위해서,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확장해 가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증인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베드로가 위법인줄 알고서도 이방인의 초대를 응한 까닭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이 율법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로, 율법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로 다가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을 얻기 위해서이다. 사랑하는 하늘가족 여러분들이 익숙하고 천국같은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말고, 박해자들이 있는 온 유대로, 상종하지 않았던 사마리아로,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 땅끝까지 그 지경을 확장해 가셔서 복음이 증인되는 2024년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