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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주) 기다림의 영성 (눅 2:25-33) 이기형 목사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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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2:25-33절 개역개정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3년 12월 17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231217(주일예배) 기다림의 영성(눅 2:25-33) 기다림의 영성(눅 2:25-33) 우리는 대림절을 지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4주간의 절기인데, 1차적으로는 구세주로 오신 성탄을 기념하며 기다리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며 기다리는 절기이다. 오늘은 본문의 시므온을 통해 기다림의 영성, 무엇을 기다렸는지, 어떻게 기다렸는지, 기다림의 결과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우리도 기다리는 자들인데, 시므온을 통해 귀한 도전의 시간이 되면 좋겠다. 1. 시므온은 무엇을 기다렸는가? 시므온이 살던 시대는 절망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로마의 압제아래 고통 받으면서 말씀이 사라진 영적 암흑기였다.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제각기 사는 법을 터득한다. 열심당 같은 이들은 나라의 독립에 소망을 두고 무력을 통해서라도 독립하겠다며 결사항전을 하였다. 사두개인이나 헤롯당 같은 이들은 로마의 지배에 순응하면서 로마에서 살 길을 찾았다. 어떤 이들은 소망이 없는 제도권 세상을 벗어나 사막이나 광야에서 은둔하기도 하였다. 시므온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절망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지만,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에게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본심은 징계가 아니다. 징계는 사랑의 수단일 뿐이다. 회초리를 드시지만 진노가 아니라 긍휼의 마음이시기에 회개하고 돌아서면 언제든지 위로해 주신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 위로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시므온이 살던 시대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안전하고 부유한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첨단 과학문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역설적이게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절실하다. 우리는 누구에게서 어떤 위로를 기다리는가?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보다도 물질이 주는 위로, 사람이 주는 위로, 세상이 주는 위로가 더욱 절실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하나님으로 인해 위로받기 보다는 물질과 사람과 세상을 통해 위로받으려 한다. 참되고 근본적인 위로는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고후 1:3). 세상의 하찮은 위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그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하시고 받으셔서 참된 평강을 누리시기를 축복한다. 2. 시므온은 어떻게 기다렸는가?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며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린다면, 그에 합당하게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누구를 만나 주시는가?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므온은 또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세상이 어떠하든지 거기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 의를 행하는 경건한 사람 시므온은 또한 성령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기회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메시아를 만난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시므온은 어떻게 이스라엘의 위로이신 메시야를 만나볼 수 있었을까? 일단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될거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그게 언제인지는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가르쳐준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만난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기다릴 수 있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사실 기다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 얼마나 조바심이 나고 지루한가? 기다리면 더 시간이 안가고, 기다리는 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낭비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기다리다가 한 눈 팔기도 한다. 성경에 깨어 있으라는 강조가 많이 나오는데, 언제 깨어있으라는 말인가? 주님을 기다리다가 잠들기 쉽고 방탕하기 쉬우니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구절처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실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갈망하는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는 아람어 마라나타(Maranatha)였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하고 성령과 함께 깨어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3. 시므온의 기다림의 결과는 무엇인가? 시므온은 메시야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찬송한다.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메시야를 볼거라는 그 약속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메시야를 만났을 때 그는 평안을 누린다.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그 마지막 기도가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면 얼마나 복될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니라, 본향 집을 찾아가 안식을 누리는 나그네처럼 평안한 안식으로 마무리하면 좋겠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구원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선언하고 있다. 정말 그런가? 듣기만 한게 아니라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져 보셨는가? 피상적인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구원, 그리고 지금도 누리는 구원인가? 시므온이 인류의 구세주로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의롭고 경건하게 성령과 함께 동행하다가 마침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감격에 찬양하는 것처럼, 우리는 인류의 심판주로 다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의롭고 경건하게 성령충만으로 살아가다가 주님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주님 품에 안겨 감격으로 찬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그 재림의 날 뿐 아니라 하루 하루를 마치면서 눈크 디밋티스(Nunc Dimittis)로 송축하는 참된 평강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마무리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사막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네 시가 다가올수록 나는 더욱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 못할거야. 그럼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겠지." 성탄절을 4주 앞두고 대림절이 시작되면서 이렇게 행복해지기 시작하고 더욱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님의 오심을 맞이하는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면서 하루하루 점점 그 날이 다가올수록 주님을 만날 기쁨에 행복해지고 기대가 되고 그 날이 소중하게 기다려지는가? 어쩌면 우리가 기다리는 위로라는 것이 물질의 위로, 사람의 위로, 세상의 위로가 전부여서 주님께서 위로를 주시려해도 그것을 받을 마음조차 없을지 모르겠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그런 평강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좇다보니 하루가 모자라고 죽음너머 깨어날 곳이 어딘지를 모르니 두려움과 고통으로 발버둥치는 것이 아닌가? 시므온의 기다림 끝에 메시야 예수를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감격하듯이,  

우리의 기다림 끝에서 메시야 예수의 품에 안겨 구원의 감격을 누리시는 하늘가족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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