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3(주) 다원화 사회에서의 주되심 | 이기형 목사 | 2023-09-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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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화 사회에서의 주되심(출 20:3)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원화 사회이다. 다원화 사회는 좋은 세상인가? 좋은 세상이라면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밖에 없는 것을 독점이라 한다. 독점 구조에서 가격을 정하거나 판매하는데 주도권은 사업자가 가질 것이다. 소비자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 이것이 바람직할까? 다른 업체들이 생겨나면 경쟁이 일어나고, 소비자는 비교하면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독점을 누렸던 이들은 옛날을 그리워하겠지만, 다른 모든 이들이 좋아할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다원화 사회가 반가울까, 두려울까? 기독교가 국교로서 존재하고, 기독교가 유일한 세상이 있었다. 기독교 왕국, 크리스텐덤.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시대의 향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 시절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모더니즘 사회는 절대적인 권위가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포스트 모더니즘, 모더니즘이 지나가고 찾아온 새로운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다원화, 기독교의 진리도 One of them 그 중에 하나로 전락해 버렸다. 절대성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런 세상이 달가울리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은 에덴동산도 어쩌면 다원화 사회였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가운데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 그루의 나무를 두셨다. 생명의 나무와 죽음의 나무,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고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 세상은 언제가 다원화 사회였다. 소수 종교로 탄압받던 기독교가 중세시대 주류종교가 되었지만, 그 시대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였던가? 역사는 암흑기라 부른다. 교권의 세상, 독재 권력의 횡포, 독점기업의 횡포를 기독교로 포장했을 뿐이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기독교 세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바뀌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세상을 변혁할 사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세상의 변혁은 나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먼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든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주인이라는 그 사실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주 되심(Lordship)이라 한다. 다원화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주 되심으로 살라. Lordship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붙들고 살라. 그것을 우리는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기독교인의 3대 보물하면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이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요약이고, 십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행동의 요약이며, 주기도문은 우리가 바라야하는 비전의 요약이다. 전통적인 교리 공부는 주로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 외 직접 친필로 기록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십계명이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모세가 준비한 두 돌판에 직접 새겨 주셨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계명을 기억해야 살 수 있기에 알아야 하지만, 최소한 10가지 주신 것은 기억해야 하지만, 그것도 안되면 1계명만큼은 마음판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 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에서 너는 누구인가? 애굽의 종살이에서 나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또한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2세대, 더 나아가 오늘날 가나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경고하신 까닭은 가나안은 다원화 사회이기 때문이다. 가나안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는가? 없다. 그럼 없는 신을 어떻게 섬기는가? 만들어서. 그러니까 우상이든 이방 신이든 다 사람의 작품이다. 곧 자기 욕망의 투영인 것이다. 가나안 민족들에게는 어떤 신이 있었는가? 바알(주인이라는 뜻)과 여신 아세라이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그 땅에 복을 내리는 신들이라 믿었다. 그 당시 사람들의 관념은 지역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서 복을 받으려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럼 이스라엘은 고무신 바꿔 신듯이 여호와를 버리고 신을 바꾸었는가?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기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Add하면 되었다. 이것이 무속이다. 무속은 여러 신들은 섬긴다.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는거라면, 뭐든지 섬긴다. 이것이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을 버려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란히, 하나님 곁에, 하나님 면전에서’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바알 우상을 섬기거나 불상을 만들어 섬기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다원화 사회에서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고 있는가?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바알의 유혹은 오늘날 얼굴만 바꿀뿐 우리 시대에도 건재하다. 어쩌면 아예 적나라한 그 민낯을 드러내고 성도를 유혹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거 아닌가? 기왕이면 풍요롭게 즐기면서 잘사는게 좋은거 아닌가? 돈만 있으면 그렇게 살 수 있는거 아닌가? 황금만능주의, 물질주의, 맘몬의 유혹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신념체제와 생활터전은 신본주의 하나님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 어쩌면 가나안의 바알보다 더 강력한 유혹을 받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기독교 복음마저 이 번영과 풍요에 오염되어 있지 않던가?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섬기는가? 무엇이 나의 Lord 주인인가?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기 재물은 맘몬, ‘배금주의’를 뜻하는 맘모니즘(mammonism)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 물질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면 나는 물질의 주인이고 주님의 종이라 하겠다. 그렇게 맘몬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마무리 사랑하는 하늘가족 여러분, 주 되심(Lordship)을 신앙의 높은 차원 성숙으로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그건 믿음이 좋은 성숙한 사람의 고백으로 여기실지 모르겠다. 그건 아니다. 주를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다. 내가 아니요 주님이라는 자기 부인과 주되심의 고백은 신앙의 정점이 아니라 출발이다. 그것이 되지 않은 믿음이라면 스스로 대견해도 주님을 따라가기는커녕 출발도 시작도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너는 나 여호와 외에 다른 주인을 네게 두지말라. 엄히 말씀하셨다. 무엇이 누가 여러분의 주인인가? 다른 표현으로 하면 누가 여러분을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 어디로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가? 하나님, 말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인이며 그래서 나는 예수께만 순종한다. 오직 그 순종의 열매로 인하여 기뻐하고 만족한다. 세상의 유혹에 한눈 팔거나 흔들리지 않고서, 남들이야 어떠하든지 나는 하나님만 섬긴다. 이 믿음의 선포가 있기를 축복한다. 세상이 다원화 사회여서 문제겠는가? 세상은 처음부터 다원화 사회였다. 오늘날 맘몬의 유혹이 더욱 강력해서 문제가 아니라 더욱 강력하신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는 나의 믿음없음이 문제 아니겠는가? 믿음의 시작 그 출발선은 자기 부인이고 주되심의 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주밖에는 없습니다’는 고백이다. 사랑하는 하늘가족 식구들이 진실한 믿음의 고백자들, 삶의 증거자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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