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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주) 아버지 노아(창 9:20-23) 이기형 목사 20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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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9:20-27절 개역개정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아버지 노아(9:20-27)

 

오늘은 Father's day이다.

인간들이 쓰레기가 되어 재활용도 안되고 청소 밖에는 방법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쓸어 버리실 때, 한 유전자를 남겨 인류를 보전하겠다는 그 프로젝트에 선택된 사람이 노아이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 노아의 가정 생활은 어떠했을까? 아버지로서 노아는 어떠했을까?

홍수 후 노아가 농사를 짓고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주를 마시고 크게 취하여 벌거벗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 모습을 노아의 막내 함이 보고서 형제들에게도 알려 주었다.

다른 형제들 야벳과 셈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옷으로 아버지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주었다.

술에서 깬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고, 셈과 야벳에게는 복을 선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는가? ‘아버지에게 잘해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

아무리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인사불성이 되어, 아무리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고 독재를 해도,

함처럼 아버지의 뒷담화를 하거나 흉을 봐서는 절대 안되고, 그러면 아버지의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셈이나 야벳처럼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고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자손들까지 복을 받을 수 있다.

물론 틀린 말씀은 아니겠지만, 너무 일방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이 아닐까?

우리는 본문에서 몇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1)이 사건은 술취한 노아가 원인 제공자가 아닌가? 오히려 화를 내고 자식을 저주하는게 마땅한가?

2)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형제들에게 말한게 그렇게 저주받을 만큼 잘못한 것인가?

혼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되어서 자식을 저주까지 하는건 너무 가혹한거 아닌가?

3)그리고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을 본 사람은 함인데, 왜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1) 술취한 노아가 원인 제공자가 아닌가? 오히려 화를 내는게 마땅한가?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가 보여준 행동은 그가 정말로 의로운 사람이었는지 의심을 자아낸다.

여기 취하였다는 말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된 것을 뜻한다.

벌거벗었다는 말은 말 그대로 벌거벗었는데, 타락한 이후 벌거벗은 모습은 자연스러운게 아니라 부끄러운 모습이고 죄인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있는 노아의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고 정당화할 수 없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이다.

본문은 노아가 당당하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니까 괜찮다는게 아니다.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 죄인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분노로 자신을 정당화하려하지 말고 정직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만 여기 본문에서는 다른 교훈을 주시는데, 위대한 사람의 실수를 보고서 주변 사람들이 죄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노아를 비난하기 보다는 우리가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정말 노아는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는 평가를 들을만큼, 방주를 지을 때 조롱과 공격과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 결과 악인들은 심판으로 사라지고 이제 평화와 승리를 누리게 되지 않았던가?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노아는 넘어진다.

온 세상이 다 타락하고 죄악으로 물들 때 그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던 노아가,

승리를 홀로 누리는 평화의 때 포도주로 축배를 들면서 돼지처럼 뒹굴고 있다.

가장 거룩한 성도가 순식간에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다.

누구도 예외라고 자신할 수 없다.

다른 누군가에게 주시는 경고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주시는 경고라면, 늘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2) 함의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게 그렇게 저주받을 만큼 잘못한거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함은 단지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옷을 다 벗은채 자는 것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 주었을 뿐인데, 그런 사소한 실수를 가지고 노아가 일어나서 불같이 화를 내며 저주를 했다면 노아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함의 행동을 나타내는 2가지 동사가 나온다.

벌거벗은 것을 보고(22) 여기 보았다는 히브리어(라아)주목하여 관찰하였다는 뜻으로, 지나가다가 스치듯 본게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보았을 때 쓰는 단어다.

알리매(22) 알리다는 히브리어(나가드)폭로하다는 의미가 있다.

어떤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의도를 갖고 선동하는 것이다.

함은 야벳과 셈 형들에게도 아비의 수치를 목격하고 쾌감을 느끼도록 충동질한 것이다.

범죄자들은 남들도 자신의 범죄에 가담토록 강요함으로써 동질감과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

함에게는 아버지의 영적 권위에 대해 반감을 숨기고 있다가, 기회가 되자 아버지를 비난하면서 그 권위에서 벗어나 자기 멋대로 살고싶은 패역함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넘어서 그 권위를 부여한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있는 사실을 보고서 그대로 이야기한 것 뿐인데, 그게 잘못이라고? 그렇다.

사랑이 함께하지 않는 정의위험한 칼이다.

강도가 칼을 드는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살해하고 파괴하기 위함이지만,

의사가 칼을 드는 이유는 사랑으로 살리기 위함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신중하게 감당한다.

치료와 회복이 없는 수술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

 

함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형제들이 야벳과 셈이다.

아버지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부끄러움을 당해야 다음부터는 조심하시지...’

아니었다. 셈과 야벳은 그 말을 듣고는 겉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았고 가려 주었다.

그것은 노아가 술에서 깨어나 아버지로서 설 때에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

다시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는데 그 어떠한 장애를 갖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사랑은 허물을 덮는다.

아버지의 거룩한 삶이 다 깨뜨려지고 연약함이 다 드러나는 현장에서 그 수치를 덮어서 가려주는 야벳과 셈을 통해 우리는 따뜻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한 회복을 예견한다.

하나님은 죄로 인한 수치심에 사로잡혀 떨고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오시고, 가죽옷을 지어 그 부끄러움을 가려 주셨다.

아버지의 수치와 연약을 가려주는 그 마음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에 대한 순종과 같은 것이다.

 

그럼 그게 그렇게 심각한 죄인가? 원인 제공자인 노아보다 더 심각한 죄인가?

문제를 처음 일으킨 노아는 아무런 저주도 받지 않는데, 그 일을 말한 함에게만 이런 엄청난 저주를 내리는 것이 정당한가?

노아의 술취한 실수는 개인적인 것이다. 자기 자신만이 죄악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함의 죄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죄가 된다.

유대인의 미드라쉬에는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 하는 자, 험담의 대상자, 듣는 자이다

노아의 실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수이지만, 함의 실수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무너지게 할 수 있는 죄가 된다.

본래 부끄러운 수치를 드러낸 노아보다도, 그 일에 험담하고 뒷담화로 공동체와 영적 권위를 무너지게 할 수 있는 함에게 치명적인 저주가 내려졌다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더욱 조심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마무리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는 노아.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켜내고 마침내 신인류의 중시조가 되었다.

그렇게 완전한 노아도 이렇게 술취하여 쉽게 무너진다.

그렇게 슈퍼맨처럼 강하고 권위적인 아버지도 사실은 연약한 존재였다

그래서 덮어주는 따스한 사랑이 아버지에게도 필요하다.

아버지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공의로 죄악을 드러내기 보다는 덮어주는 사랑이 더욱 필요하다.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에 강제적이고 피동적인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에 대해 마음의 존경과 사랑으로 대할 때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를 공경하므로 그렇게 복을 받는 자녀들이 되시고,

우리 아버지들은 오늘 아버지의 날에 믿음의 본이 되는 귀한 권위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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