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30(주) 바벨론의 강변에서(시 137:1-9) | 이기형 목사 | 2023-04-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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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137:1-9절 개역개정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바벨론의 강변에서(시 137:1-9)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 시편을 인용한 음악 가운데 널리 알려진 노래는 Boney M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라는 노래가 있고 베르디(Giuseppe Verdi)의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 Nabucco>가 있다. 조국에서 끌려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오늘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준다. 시편 137편은 저자가 누구이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시의 내용으로 보건대 성전에서 악기 연주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던 레위인이 나라가 망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을 때에 조국과 성전이 있는 시온(예루살렘)을 그리며 노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포로 생활의 비참한 실상을 말하고(137:1-3), 그럼에도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며 예루살렘을 소망하면서(4-6),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파괴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탄원(7-9절)을 말하고 있다. 1. 포로민의 비참한 실상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게 함락되면서 성전은 초토화되고 시드기야 왕은 눈이 뽑히고 백성들은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눈물의 삶이었다. 울었다는 말은 방성대곡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눈물은 포로로 끌려와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통곡한 이유는 ‘시온을 기억하며’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성소인 시온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쳐 통곡하고 있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버드나무는 잎이 흔들리며 서로 부딪혀 처량한 소리를 내는 까닭에 슬픔의 감정을 비유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수금(비파, 하프)’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사용했던 악기였다. 그것을 연주하지 않고 버드나무에 걸었다고 하는 것은 그냥 보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여기 걸었다는 단어는, 사람을 ‘나무에 목메어 죽일’ 때 사용된 단어이다. 마치 수금이 처형당한 죄수처럼 걸려 있는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그 수금은 시인의 자화상과 같다. 이들은 왜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고 연주를 거부했을까? 3절에 이유가 나오기에 함께 봉독하자.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시인의 삶을 약탈하고 황폐하게한 자들이 자기들을 기쁘게 하도록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는 것이다. 포로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는데 즐겁게 노래하라는 것도 비참하고 처절하지만, 무슨 노래인가? 시온의 노래는 거룩한 도성에 거하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담고 있다. 이런 시도는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멸시하려는 것이다. 1-3절은 바벨론 포로의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시온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기쁨으로 예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시온의 영광은 지나간 추억이고, 바벨론에 끌려와 그저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해하는 것은 아닌가? 우린 무엇 때문에, 뭐가 그립고 아쉬어서 울고 있는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광대가 되어서 무슨 노래든 노래할 수 있고 누구라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타협하는 것은 아닌가? 시인은 그것을 거부한다. 2. 저항과 신앙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어찌 부를까? 결단코 부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시인은 이방 땅이라고 부른다. 비록 포로로 끌려와 정착하고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이방 땅이다. 언젠가는 시온으로 돌아가 하나님 받으실 찬양을 올리고 싶은 열망이 있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 열망이 있다. 이들이 시온에 있을 때는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예배가 형식적이었고 습관적이었다. 때로는 번거롭고 귀찮기도 했다. 결국은 그로 인해 망하고 이렇게 포로로 끌려와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찬양할 수 없는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받자 새삼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이미 망하고 황폐하게 된 예루살렘이지만 시인은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한다.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먼저 시인은 예루살렘을 부르면서 ‘내가 너를 잊는다면’ 이란 가정법을 도입하고 있다. 만일 그렇게 예루살렘을 잊어버린다면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수금을 타는 기술은 오로지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함인데, 예루살렘을 잊어버렸다면 그의 숙련된 연주 기술도 잊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두 번째 가정은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거나 예루살렘을 나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혀가 입천장에 달라 붙어버리라’고 선포한다.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성소를 잊어버린다면, 그 무엇을 가진들 어떻게 성공한들 무의미한 것이다. 포로로 비참한 삶을 산다해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소를 잊지않고 붙들고 있다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회복케 하셔서 예루살렘에 돌아가 참된 기쁨의 삶을 살게 될거라는 그 믿음으로 오늘을 이겨내는 것이다. 사랑하는 하늘가족 여러분, 우리도 본향을 떠나 이방의 땅에 살고 있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소를 잊어버린다면 차라리 내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나에게 주신 재능도 능력도 주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거두어 가시는게 낫다고, 그렇게 고백할만큼 우리는 절실하게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가? 나의 최고의 기쁨은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소라고, 거기 갈 수 없는 여건 속에서도 그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그렇게 열망하시는가? 지금 포로로 끌려온 시인이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시온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처럼,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든지 늘 그렇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한다. 3. 원수에 대한 탄원과 저주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결단하면서 하나님께도 잊지말고 기억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안겨준 이들이 있었는데, 에돔과 바벨론이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조롱한 에돔을 치시라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당사자인 바벨론은 말할 것도 없다. 시인은 시온이 당한 그대로 바벨론도 당하기를 간구한다. 동해보복법에 근거한 것이다(출 21:24) 그 구체적인 저주가 9절에 나오는데 함께 읽자.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너무 잔혹한 저주인거 같은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당했던 일들이다. 성경에는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다. 지금 시인은 원수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다.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고, 그 상처로 인해 독을 품고 있고, 그래서 저주하게 되고.. 그런 모든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 토하는 것으로 말씀한다. 시 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토하는 것은 비워내는 것이다. 먹지 않아야 할 것을 먹었으면 토해내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마무리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그들은 바벨론 강변에서 방성대곡한다. 포로 생활이 고달파서도 그랬겠지만 시온을 기억하면서, 곧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시온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수금을 처형당한 죄수처럼 버드나무에 걸어놓고 손대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까닭은 바벨론 사람들이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모욕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바벨론 강변에 살면서, 이제는 다 끝났다고 바벨론에 잘 정착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세상의 노래를 부르면서라도 그렇게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울고 통곡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처럼 갖지 못하고 누리지 못해서인가? 시인은 그럴 수 없다고, 이방 땅에서 이방인을 위해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결단한다. 그리고 돌아갈 시온,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소를 잊지않고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 예루살렘을 잊어버린다면 자기의 재주도 능력도 잊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예루살렘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차라리 입을 닫고 사는게 낫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무슨 성공을 누린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열망하는 믿음의 삶이 되시기를 바란다. 마음에 있는 어떤 아픔과 고통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토해내고 쏟아내시기를, 내 스스로는 해독할 수 없고 치유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 내어 드리면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평으로 갚아주시고 고쳐주실 것이다. 오늘 우리도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시온 하나님의 성소를 늘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귀한 가족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이 이름으로 마음다해 축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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