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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주)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눅 22:61-62) 이기형 목사 202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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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22:61-62절 개역개정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3326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22:61-62)

 

누구나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저렇게 흉악한 폭력을 저지르면서 그게 범죄요 폭력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학폭의 가해자들은 그냥 장난으로, 친해지고 싶어서그런거라 말한다.

직장의 괴롭힘다 너 잘되라고, 사회와 직장에 잘 적응하라고 그런거라고 말한다.

연인이나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사랑하니까, 사랑해서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보면 가해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거 같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라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자기의 잘못을 안다면 적어도 개선해 보려고 노력할텐데,

아예 자기의 잘못을 모른다면,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른다면 절망적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흔히 무식하면 용감하다든지, 근거없는 자신감에 충만한 사람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할까 궁금할텐데,

코넬 대학교 사회 심리학 교수 더닝과 그의 제자 크루거더닝-크루거 효과'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일종의 인지편향이.

그러니까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능력있게 보이려고 아는척 하는게 아니라, 그 사람은 진심으로 자기가 알고 있다고, 자기가 대단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자존심이 강하거나 과시하려는 위선이 아니라,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인지심리학에서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능력이 있다고 한다.

메타인지는 인지에 대한 인지,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인지하는 능력이다.

자신의 행동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기 객관화 능력으로 볼 수 있다.

암튼,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아야 개선의 여지가 있는데, 그것을 모르니 변화가 없는 것이다.

메타인지 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변화하고 성장할 것이다.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면 뾰족한 방법이 없는거 아닌가?

자기가 벌거벗고서도 최고의 옷을 입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도리가 없는거 아닌가?

그것을 깨우칠 방법이 있다면, 외부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의 얼굴을 자기가 볼 수 없지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거울이나 사진이 있다.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의 확신이 아니라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순절 기간은 자기의 믿음과 신앙을 성찰하고 주님 앞에 바로 세우는 기간이다.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지, 고난의 현장에 있었던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1. 장담하는 베드로

일찍이 주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버릴 것을 예고하신바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단호하게 모두 주를 버려도 자기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친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다시한번 죽을지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다.

이것은 베드로의 허풍이나 오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과연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을 증명하였을까?

 

2. 주님을 따르는 베드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유다를 내세우고 와서 예수를 잡아가려 하였다.

주님을 잡아가려는 무리들 앞에 칼을 휘두르며 막아선 사람은 베드로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류하시면서 순순히 체포 당하신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뿔뿔히 흩어졌지만 베드로는 멀찍이서 주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들어간다.

베드로는 자기의 고백처럼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고 따르고 있다.

참으로 대견한 주님의 수제자가 아닌가?

 

3.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대제사장의 뜰에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모여 앉아 있었다.

베드로는 이 무리 속에 자신을 은폐하고 사태의 추이를 살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서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고발한다.

베드로는 한 마디로 부인한다.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함께 있기는커녕 나는 그를 알지도 못한다고 잡아뗀 것이다.

잠시 후에 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고발한다. 너도 그 도당이다

첫번째 여종과는 달리 두번째 사람은 베드로를 향해 2인칭 ''라는 말로 직접 심문하듯 폭로하고 있다.

이번에는 한 패거리라고 한통속이라고 몰아붙이자 베드로가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고 부인한다.

마태의 표현을 빌리면 베드로는 맹세하며 부인한다.

한 시간쯤 있다가 한 사람이 장담하면서 확신있게 베드로를 지적한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는 오리발을 내밀고 잡아뗀다.

이 사람아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4. 무지한 베드로를 깨운 것은

베드로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정작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으면서도 세 번이나 저주 맹세까지 하며 주를 부인할 수 있을까?

한 두번은 어쩌다가 실수 했다고 치더라도 세 번은 실수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베드로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제자들이 흩어졌는데 그래도 자기는 주님과 함께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볼 때는 참으로 안타까운거 아닌가? 주님을 부인하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

 

그런데 세 번째 주를 부인하고 있을 때 닭이 울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리도 아니고 그저 자연 속에서 울리는 평범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 때 베드로는, 닭울음과 함께 돌이켜 자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과 마주쳤다.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순간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생각났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께서 일찍이 베드로가 세 번 자기를 부인할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큰소리치고 장담했었다.

주님의 시선을 받고서야 그 말씀이 생각났고 여지없이 무너져있는 자신의 모습에 직면한 것이다.

사실 베드로는 일찍부터 무너지고 있었고 무너졌지만, 자기만 그렇게 생각지 않았었다.

자기 기준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에 견주어보니 너무 부끄러운 것이다.

너무 부끄럽고 추잡스러워서 더 이상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버틸 수가 없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자기도 자기가 저주스럽고, 뭐 이런 놈이 다 있냐고, 후회와 탄식이 저절로 나오지 않았을까?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한다.

 

5. 마무리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하였다는데,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내가 지금 주님께 혹은 이웃에게, 나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주님은 안타까워 하는데, 이웃과 지체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정작 나는 아무렇지 않다면...

이만하면 잘 하는거 아니냐고 이정도면 괜찮은거 아니냐고 아무 문제 없다고 기특해하고,

남들도 다 그러는데 어쩔 수 없는거 아니냐합리화로 정당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으니, 변화는 없고 늘 그대로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날을 주시려고 얼마나 많은 닭 울음 소리를 들려 주셨던가?

그럼에도 세상 음악에 취하여 그 소리를 듣질 못한다.

주님은 채찍을 맞으면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나를 챙기신다고 사랑과 용서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는데 나는 애써 주님의 시선을 외면한다. 주님께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래서 뻔뻔하다. 울고 통곡해야 하는데 세상에 취해서 즐거워한다.

 

그렇다. 몰라서.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몰라서 그러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사도 바울도 주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생각했다.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은 모두가 주를 버리고 흩어졌는데, 자기만 주님곁이 있다고 스스로 대견해하지 않았을까? 주님을 부인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어디 그들 뿐이겠는가? 나도 그런 것은 아닌가? 어짜피 우리 모두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 무지와 착각을 어찌할까? 어떻게 그 견고한 무지를 깨우칠 수 있을까?

베드로를 깨운 것은 자기를 바라보시는 그 주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리고 닭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 닭이 울기전에 세 번 부인할거라는 님의 말씀도 기억났다.

그 앞에 베드로는 무너진다. 베드로는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 앞에 심히 통곡한다.

 

시선이라는 찬양이 있다.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볼 것이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할줄 믿는다.

 

사랑하는 하늘가족 여러분.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자.

조롱과 멸시로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사랑과 용서의 시선으로 따뜻하게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에 눈을 맞추시길 바란다.

잠든 영혼을 깨우고, 새 날을 주시려는 닭 울음 소리를 들으시길 바란다.

그러할 때 잊혀진 주님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을 것이다.

괜찮은 신앙인줄 알았는데 빈 껍데기일 뿐이고 실상은 무너진 나를 바라보며 통곡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할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실 것이다.

이 사순절 시간에 그렇게 날마다 새로워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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