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9(주)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벧전 4:10) | 이기형 목사 | 2023-03-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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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9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벧전 4:10)
믿음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주를 위해 힘써 일하고 싶은 생각은 있겠지만, 삶의 여건이 여의치 않아 못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생활에 안정이 되면, 집도 장만하고 직장도 있고 자녀들도 장성하면, 그러면 그 때는 주를 위해 힘껏 살아갈 수 있을거 같은데, 지금은 ‘아직 아닌거 같다’는 생각을 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부요와 장수는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것을 기복주의라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누군들 그런 생각이 없을까? 성경에 보더라도 부요와 장수는 하나님의 주시는 최고의 복이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솔로몬도, 야베스도 모두가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부와 장수의 성취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그 풍성한 부요와 복을 통해 보여 주시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구약을 예표(그림자)로, 신약을 성취로 본다. 그것을 구속사적인 관점이라 한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류에게 하나님은 그 즉시 구원의 그림자를 보여주셨는데, 원시복음이라 한다. 거기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누구를 가르키는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승리와 영광을 미리 보여준다. 그러니까 손가락을 보지 말고, 그 손가락이 가르키는 달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재물과 장수가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요로운 삶의 그림자로 보여준다면, 그 풍요로운 삶은 누구에게서 완성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이다(요 10:10). 하나님의 주실 풍요의 그림자 그 일부분이 부요와 장수라면, 하나님께서 주실 부요와 장수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소유의 풍성함을 넘어서는 참된 풍요로움이 있다. 장수를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 영생이 있다. 그 본질적인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 삶이 궁핍하고 가난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풍요가 없어도 행복하고 즐겁다는 말이 아니라, 괜찮다는 말이다. 그보다 값진 예수가 있으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복주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화이다(골 2:3). 우리가 간구하고 붙들어야 할 것은 안정적인 삶이나 부요와 평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으면 그를 놓치면 부요하고 형통해도 참된 만족이 없다. 공허하다. 부요와 안정된 삶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온전한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시는, 믿음으로 살아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부요와 장수는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와 축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분명히 부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재물과 부요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전 5:19).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우리는 그것을 은사라 부른다. 카리스마,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무엇인들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은사는 그 범위가 굉장히 넓다. 재능도, 건강도, 재물도 다 은사라 하겠다. 바울은 좁은 의미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을 은사라 말하기도 한다.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들 9가지를 소개한다.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은사는 이렇게 좁은 의미에서 특별한 능력을 생각한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 은사는 재물도 부요도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임을 기억해야 한다. 1.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돈을 주고 구입할 수도 없고, 간구해서 얻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데, 주권적으로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 그래서 부요한 그리스도인도 있고 가난한 그리스도인도 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도 있고 병약한 그리스도인도 있다.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도 있고 갖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아니다. 분배에 있어서는 공평하지 않다. 그렇기에 그 가진 것을 비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다고 교만하게 자랑하거나, 없다고 열등감에 움추릴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은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신다. 2.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바울은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말한다.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해도, 예언과 지식과 믿음의 은사가 있다해도, 탁월한 구제의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럼 사랑이 최고의 은사라는 말인가? 그건 오해이다. 바울은 그렇게 방언과 예언과 구제를 사랑에 비교해서 사랑이 최고의 은사라고 말하는게 아니다. 방언을 말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음에 불과하기에 방언을 말할 때 사랑으로 해야 더욱 큰 은사가 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 우리가 반드시 맺어야 하는 성령의 열매이다.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무슨 은사든지 은사되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그래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하신다. 고전 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재물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만하지 말고 사랑과 긍휼로 그 은사를 감당하라는 것이다. 3. 은사에는 목적, 사명이 있다. 재물과 부요가 복이라면 나에게 주신 복을 내가 마음대로 누려도 괜찮다. 그런데 은사는 다르다. 은사는 누리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데,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은사는 누림이나 자랑이 아니라 섬김의 도구요 수단인 셈이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우리 각자는 은사를 받았다.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든지 성령의 나타나심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그가 할 일은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는 것이다. 나에게 맡겨주신 은사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봉사이다. 그러므로 재물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건 우리 삶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할 목적이 아니라면 지금 주신 것으로도 충분히 주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은사가 성령의 나타나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수단과 방법이라면, 그 은사는 언제나 좋은 것들만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 우리의 가난과 약점도 하나님의 은사 선물이 될 수 있겠는가? 거기에도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수 있는가? 지금 내가 불안정하고 가난하고 연약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령의 나타나심이 될 수 있겠는가? 나의 성공과 형통이 아니라 고통과 역경과 가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지금 내가 어떠하든지, 부요하든 궁핍하든, 그 삶의 여건이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계획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 성공하고 형통하면 그 때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지금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무리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삶이 추구하는 방향과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조금만 더 여유롭게 하시고 조금만 더 넉넉하게 해 주시면 저도 주님을 위해서 조금 더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섬길 수 있다고 거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탁월한 은사를 주시면 나도 폼나게 주의 영광을 높일 수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걸 주시지 않은거 같아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무가치한 인생, 그저 이 세상에 잘먹고 잘살다가 죽으면 그만인 그런 인생인가? 조금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와 기준이 될 수 있겠는가? No.... 설교 제목처럼 우리의 삶의 목표는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부요와 형통도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은사요 사명이다. 그래서 지금 여유가 없고 넉넉하지 못해도, 나는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기에 내게 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신 삶의 선물 가운데 사명을 바라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부요와 보물이 되시기에, 주님을 잃어버리고 잠시 주님을 망각하고 그 댓가로 얻는 세상의 형통보다는, 형통하지 않는다해도, 내 삶이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나는 지금 주님을 선택할거다. 가난이나 고난도 주님을 드러낼 수 있는 주님의 일하심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 가난과 고난의 길이 즐겁지도 않고 신나지도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건 주님이 주신 삶이고, 주님이 함께 하시며, 주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시는 하늘가족 여러분. 교회가 조금만 더 커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렇게 인간적인 것이겠는가? 여러분의 삶에 조금만 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그렇게 세속적인 것이겠는가? 그건 아닐거다. 그렇지만 지금 작고 보잘 것 없는 내 삶에 함께 하시는 예수의 은혜를 놓친다면, 지금 나에게 주신 선물과 은사를 보지 못한다면 더 큰 선물이 주어진다해도 우리는 알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것에 충성되지 못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축복이 아니라 사명인 삶을 살아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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