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1 (주일예배) 메시야의 조상들 룻과 보아스(마 1:5, 룻 4:13) | 이기형 목사 | 2022-12-11 | |||
|
|||||
메시야의 조상들 - 룻과 보아스(마 1:5) 성경 66권중 여성의 이름으로 된 책은 몇 권이 있는지 아시는가? 룻과 에스더이다.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니다. 그도 불합격 인생이었다.
1. 진입불가 본래 룻은 이스라엘의 족보에 올라올 수 없었다. 원천적으로 차단된 사람이었다. 본래 이스라엘은 이방 결혼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지켜가기 위함이었다. 이방 민족 중에서도 더욱 엄격히 금한 족속들이 있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었다(신 23:3). 이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모압과 암몬의 땅은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허락지 않으셨다(신 2:9). 그런데 모압은 이스라엘의 화친 제의를 거부하고 이방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었다. 나아가 모압 여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에 빠지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스라엘에 2만4천명이나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모압과 암몬은 영원토록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다. 모압과 암몬 족속은 자기 발로는 들어갈 수 있는 진입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그럼 룻은 어떻게 이스라엘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이스라엘 족속들이 룻에게로 찾아온 것이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여리고의 라합을 찾아온 것처럼 이스라엘 족속이 모압을 찾아왔다. 베들레헴의 엘리멜렉 가족인데, 이들은 모압의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살길을 찾아 모압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은 죽음의 길이 되고 말았다. 집안의 남자들,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타국에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살길을 찾았던 이들은 죽고 말았지만, 이들로 인해 살아난 사람이 있으니 룻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룻을 구원하기 위해 구조대를 보내신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암튼 룻은 자기 민족을 찾아온 엘리멜렉의 집안에 시집와서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었다.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이다. 2. 퇴출 위기 룻이 이스라엘의 식구가 되었는데, 위기가 찾아왔다. 남편이 죽은 것이다. 룻의 남편뿐 아니라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죽고만 것이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들에게 자유를 주어 친정에 돌아가 새 삶을 살라고 한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가 싫어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며느리를 후대하고 있다. 그 사랑에 감동한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사랑에 감동한 룻은 다른 선택을 한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고 말하고 있다. 룻은 족쇄가 풀렸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나오미에게 접착제로 붙듯 붙고 있다. 오르바와 룻 누가 지혜로운 선택을 하였는가? 룻은 그렇게 만류하는 시어머니에게 자기는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이제는 자기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오르바는 그 백성과 모압의 신 그모스에게로 돌아갔지만, 룻은 그모스에게서 나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으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룻에게 베들레헴은 들어보지도 못한 타국일 뿐이고, 남편도 없고 돌봐드려야 할 시어머니와 함께 가지만 그럼에도 거기는 하나님이 돌아보시는 땅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가? 사람들은 소망없는 고생길이라고 비웃었겠지만, 룻은 거기서 소망을 보았고 구원을 보았다. 안락한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유혹과 압력도 있었지만, 룻은 그것을 이겨내고 하나님을 선택하였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당신을 선택한 룻을 위해 어떤 은혜와 호의를 베들레헴에 예비하셨을까? 3. 소망없는 베들레헴의 두 과부 과연 하나님께서 돌아보신 베들레헴에는 풍요가 넘쳤다. 그렇지만 늙은 과부 나오미와 젊은 과부 룻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을 뿐이고, 그들은 남의 밭에 추수하고 떨어진 부스러기 이삭을 주워서 근근히 살아가야 했다. 과부로 혼자살기도 힘들텐데, 늙은 과부 나오미를 공양해야하는 룻은 어떤 소망과 기대가 있었을까? 그렇게 기대할만한 아무 소망이 없었다. 우리는 룻기를 읽다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된다. 성경은 우연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세상적으로는 소망없는 삶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서 소망이 되셨다. 하나님이 소망이다. 엘리멜렉 가족을 모압으로 보내 룻을 불러오신 하나님은 이번에는 룻의 구속자를 보내주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보아스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데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중에 하나이기에 그렇다. 기업 무를 자, 이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엘’은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구속자 구원자이다. 보아스는 고엘, 기업무를 자의 의무를 룻에게 기꺼이 이행하게 된다. 룻은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구속자를 만나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는 오벳이다. 그리고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된다. 그렇게 보면 룻은 메시야의 족보에 큰 징검다리를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당신의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죄로 신음하며 소망없는 이들에게 룻의 후손으로 구속자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역사의 시간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다. 대림절에 우리의 기다림은 오신 주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모시기 위함도 있지만, 더욱 절실하고 소중한 기다림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무엇도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고 오로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