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8 (주) 메시야의 조상들 -밧세바와 다윗(마 1:6) | 이기형 목사 | 2022-12-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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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의 조상들 - 밧세바와 다윗(마 1:6)
메시야의 족보에 오른 네 번째 여성은 밧세바이다.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이름이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로 등장한다. 밧세바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까? 그리고 다윗의 족보인데 우리야가 왜 등장하는가? 사무엘하 11장으로 들어가보자 1. 밧세바는 누구인가? 성경에는 그녀를 엘리암의 딸이요 우리야의 아내라고 밝혀준다. 또한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을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밧세바의 할아버지는 아히도벨이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전략통이고 두뇌였다. 그러니까 다윗의 측근중에 측근이라 하겠다. 밧세바의 아버지는 엘리암이다. 아히도벨의 아들로서 엘리암은 다윗의 30인 용사 중에 한명이었다. 딸이 다윗에 의해 짓밟히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럼에도 엘리암은 끝까지 다윗의 충성스러운 용사로 남는다. 밧세바의 남편은 헷 사람 우리야이다.. 우리야 역시 30인 용사 중에 한 사람으로 그 이름이 성경에 기록될만큼 충성스러운 용사였다. 그를 헷 사람이라고 밝혀준다. 헷족속은 가나안 원주민들로 전멸을 당할 이방인이었다. 우리야는 포상 휴가로 집에들어가라는 다윗의 명령을 거부할만큼 충성스러운 용사였다.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과 아버지 엘리암, 그의 남편 우리야, 모두가 한결같이 다윗의 측근이고 충성된 신하들이 아닌가? 이런 집안의 딸이며 아내라면 밧세바 역시 올곧고 충성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밧세바와 다윗과의 만남 이런 밧세바가 어떻게 다윗과 만나고 다윗의 아들을 낳았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밧세바를 다말이나 라합이나 룻과 같이 능동적인 사람으로 보면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상반된 다른 시각은 밧세바를 수동적인 사람으로 보고 성폭행 피해자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군이요, 메시아의 모형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다윗을 변호하려다보니 밧세바를 깎아내릴 수 밖에 없었다. 다윗을 높이려는 사람들을 다윗이 꽃뱀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한다. 다윗이 옥상에 올라가는 그 시간에 밧세바는 다윗이 볼 수 있도록 옷을 벗고 목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밧세바가 목욕한 시간은 벌건 대낮이 아니라 어둠이 내린 저녁 때이다. 밧세바가 어두워지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목욕했다는 것은 남의 시선을 피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목욕의 이유도 생리가 끝날 때쯤 시행하는 정결의식을 위함이었다. 밧세바는 다윗에게 생각이나 마음이 없는데, 반면 다윗은 어떠한가? 밧세바와의 사건에 사용된 동사는 다윗이 능동적으로 범죄를 계획하고 진행하였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철저하게 위력에 의한 성폭행이었다. 오늘날도 빈번한데, 그것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은 그래도 뭔가 피해자가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겠냐고, 그래도 같이 즐기지 않았겠냐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좋아했으니까 묵인한게 아니냐고 가해자를 두둔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로지 다윗에게 그 책임을 물으신다. 나단 선지자는 밧세바를 전혀 책망하지 않는다.
3. 피해자에서 주인공으로 그렇다면 밧세바와 다윗의 만남은 어떻게 된 것인가? 밧세바는 권력자에 의해 짓밟힌 희생자요 억울한 피해자일 뿐이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남성우월주의자들에 의해 한 번 더 짓밟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가정 배경을 살펴본대로 우리야와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어느 날 왕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을 때 왕은 자기를 짓밟았고, 남편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나마 성군 다윗이 남편 잃은 과부를 거두어주고 죽은 남편을 대신해서 자기를 책임지려는 호의에 감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은 그것이 아니잖는가? 밧세바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편과 가정까지 빼앗은 파렴치범이 다윗이라는 것을 언제 알았을까? 아무리 늦어도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 책망하고 심판을 선포할 때는 알지 않았을까? 진실을 안 밧세바는 어떠했을까? 자기와 가정을 짓밟고 자기의 남편을 죽인 원수와 부부가 되어 살아야 하다니. 그런데도 하나님의 사형선고 심판은 그 파렴치범 다윗이 아니라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내려졌다. 여러분이 이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무리 왕궁에서 다윗왕의 후궁으로 살아간들, 다윗의 사랑을 받고 살아간들, 그 삶의 고통을 감당해 낼 수 있었을까? 주님은 악한 자는 심판하시고 약한 자는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신다고 말씀하신다.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돌아보셨다. 그녀를 긍휼히 여기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은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세우셨다. 그리고 그의 후손으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밧세바를 메시야의 족보에 올려주셨다. 세상에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지만 거기 올라있는 여성은 5명, 그 다섯 손가락 안에 든게 아닌가. 비록 밧세바 그의 이름이 아니라, 이상한 이름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간음과 살인이라는 다윗의 범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하늘가족 여러분 세상은 힘이나 권력이면 불가능이 없다고 큰소리친다. 어쩌면 다윗도 주변을 평정하고 승승장구할 때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던거 같다. 율법이 금한 충성스러운 부하의 아내까지 탐내면서 부하를 죽였으니까. 이 흉악한 범죄에 누구도 ‘아니라’ 하는 사람이 없고 거기 동조하며 피해자 탓을 한다. 그러면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악인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시며, 억눌리고 짓밟힌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작고 약한 그를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그를 통해 일하신다. 그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메시야의 족보에 영광스럽게 올려 주신다. 비록 내가 작고 연약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불의와 타협하거나 세상 길을 걷지않고 바른 의를 지켜가려고 할 때 하나님은 나를 들어 쓰실 것이다. 그 가는 길이 어렵고 힘든 여정일 수 있고, 오해를 받고 억울한 피해를 당하거나 사람들의 외면을 당할 수는 있지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보신다. 세상 역사가 강자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기록되기에, 하나님을 갈망하고 의지함으로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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