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31(주일예배)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행16:31) | 이기형 목사 | 2022-07-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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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행16:31)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다녀본 적이 있는지를 물어보면, 예전에는 성탄절이든 성경학교든 한번쯤은 가봤다고 대답했는데 요즘은 가본적이 전혀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 교회는 정말 신세계였다. 세상에 없는 것들이 교회에는 있었다. 문화와 오락과 만남과... 세상을 앞질러 나갔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이 더 재미있고 풍요롭게 달라진 것이다. 성공의 길이 세상에 있었다. 오히려 교회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지나간 구습에 매여있는 것처럼 답답하게 보였다. 세상이 얼마나 흥겨운지 교회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이성과 합리성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더 이상 세상적인 재미나 축복으로는 교회에 이끌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없지만 교회에만 있는 것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오늘 사람들에게 유효할까? 세상에 없지만 교회에만 있는 것은 복음이고, 복음이 주는 결과를 구원이라 한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가? 본문에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 말씀은 쉬우면서도 쉽지 않다. 어쩌면 나에게는 구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되거나 속박에서 해방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위험한 상황이나 속박되어 있으면 구원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구원이 필요없는 것이다. 본문의 상황을 보면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혀 발이 착꼬에 매였다. 그럼에도 기도하고 찬미하자 지진이 나서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으며 매인 것이 풀렸다. 이것을 보고 간수가 자결하려 하자 바울과 실라가 만류하는데, 이 상황에 간수는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물었고,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가르쳐준 것이다. 이 상황에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은 죄수로 묶여있던 바울인가? 바울을 지키는 간수인가? 그럼에도 간수가 죄수를 향해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나, 죄수가 간수를 향해 구원을 받으라고 가르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눈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유하지만 묶인 사람이 있고 묶여 있지만 자유한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말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자유한 것처럼 모이지만 사실은 묶여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 간수를 보면 죄수들이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으면 잘된거고 안심이 아닌가? 그럼에도 구원의 길을 묻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간수는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를 본 것이 틀림없다. 안정적인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던 울타리가 허물어질 때, 언제까지나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줄거 같았던 것들이 사실은 신기루라는 것을 발견할 때, 곧 인생의 연약과 허무를 깨달을 때 그는 좌절하면서 비로소 하나님께 구조 요청을 보낸다. 빌립보의 간수가 자기의 터전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 무엇을 보았을까? 자기의 실존이었다. 그가 편하고 안정적일 때 보이지 않다가 삶이 흔들릴 때 비로소 보였던 그것은 갑자기 생겨난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유하다고 그래서 구원이 필요없다고 자신한다. 모든 인생은 죄로 인한 저주와 사망에 놓여 있기에 결국은 거기에 침몰할 것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인생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누구나 예수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인생은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하나님을 만날 때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비로소 우리를 향한 계획과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 그 풍성함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자유이며 또한 기쁨이다. 바울은 옥에 매이면서도 자유를 누렸고, 간수에게 구원을 전하고 있다. 사랑하는 하늘가족 여러분. 예수가 없어도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평탄하고 행복하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거 같은데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물으신다면,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수렁에 빠졌을 때 보이는 연약과 허무라는 인간의 실존은 행복하고 편안할 때에도 가리워 있을 뿐이지 사실은 다르지 않다. 꼭 고난이 와야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나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 예수 안에 나를 향한 인생의 멋진 계획이 있고 참다운 자유와 풍요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당신께로 인도하셔서 구원얻은 자유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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