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0(주일예배) 그가 찔리고 상함은(사53:4-6) | 이기형 목사 | 2022-04-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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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이사야53:4-6절 개역개정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리고 상함은(사 53:4-6)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목적지는 골고다 십자가였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라 하신다. 대속물이라 함은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대신 지불하는 값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누군가는 ‘누가 나 대신 죽어 달라고 했는가?’ 라며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거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1.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4) ~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들은 천방지축으로 나서다가 유대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 지배하에서 예수를 죽일 권한이 없었으므로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을 요구하는데 죄목은 종교적인 신성모독과 정치적인 반역이었다. 신성모독이라 함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인 주제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고, 유대인의 왕이라 했으니 반역자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알기로는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는 목수였고 그 형제들까지도 뻔히 알고 있는데, 자기들은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결국은 예수의 죽음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2. 그의 고난의 이유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질고와 슬픔은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 고난과 정신적 고통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과 고난을 대신 당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질고와 슬픔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5절에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함이라고 말씀하신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결국은 예수의 고난은 자업자득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한 질고와 슬픔을 대신 감당한 것이다. 예수는 정말로 우리의 질병과 고난을 대신 당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모독과 자칭 왕이라는 자업자득으로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러한 생각 자체가 죄라는 것을 증거한다. 허물과 죄가 무엇인지를 6절에서 말씀하신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 양은 가장 약한 동물이라 목자를 떠나면 맹수의 밥이 될 수 밖에 없다. 곧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다. 양이 목자를 떠나면 죽음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떠나지 않을텐데, 떠났다해도 곧 돌아오려 할텐데, 무지한 양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불행이다. 이것은 양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현주소를 말해 주고 있다. 인생이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렇다. 그런데 6절 말미에 복음이 선포된다. (6) ~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죽는 것을 못보신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모든 죄를 대신 지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당할 인생의 모든 질고과 슬픔, 허물과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형벌을 당하신 것이다. 3.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결과는 무엇인가? (5) ~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내가 당할 징계를 내가 맞을 채찍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누리는 것은 평화와 나음, 고침과 치유이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브릿지 다리가 되어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 사역이고 기독교의 복음이다. 마무리.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늘 듣던 이야기이고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믿어지는데, 정작 나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은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고민이 거기에 있다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사람의 기억은 세월 따라 희미해지고 그 감동도 식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고난주간을 지낸다. 이 고난주간만이라도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며 동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 주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하시겠는가? 금식을 하기도 하고,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지만. 예수의 고난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한 고난이었다. 예수를 살아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죽어 살린 열매가 바로 나라면, 이제 나를 통해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인데, 부활하신 주님께 영광돌릴 가장 값진 예물은 생명이다. 주께서 그 영혼 살리기 위해 죽으셨는데, 나의 수고로 인해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온다면 그것처럼 기쁜 예물이 어디 또 있겠는가? 멀리 가지 않으셔도 하나님께서 내 주변에 나에게 보내주신 그 한 영혼, 그 잃어버린 생명.. 주님 앞에 인도하신다면 나를 통해 예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주간 그렇게 부활주일을 준비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하늘가족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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