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30(주)미움받을 믿음의 용기를(요 15:18-21) | 이기형 목사 | 2022-01-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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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15:18-21절 개역개정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미움받을 믿음의 용기를(요 15:18-21) 오픈도어즈에서 해마다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는 50개국 목록 '2022 세계 기독교 박해보고서(World Watch List, WWL)를 발표한다. 이번엔 20년 부동의 1위를 제치고 아프가니스탄이 1위에 올랐다. 자료에 의하면 박해받는 기독교인 수가 76개국 3억 6천만명으로 작년보다 약 2천만 명 증가했다. 전 세계 기독교인 7명 중 1명 꼴로 박해를 받는다는 의미다. 박해 수치는 해마다 올라가고 있다.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서 그렇게 핍박과 박해를 받으면서 신앙을 지키고 있다는게 믿어지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이유로 박해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께서 그 이유를 가르쳐 주신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있는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얻는가? 미움과 박해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 우리를 미워함이 아니라 예수를 미워함이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유없이 부당하게 미움과 고난을 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미워하는 것인데, 우리가 부당하게 이유없이 고난을 받는다면 그건 우리를 통해 예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예수가 드러난다면, 그야말로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기뻐하라는 것이다. 2. 우리가 예수께 속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움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세상에 속한게 아니라 예수께 속했기 때문이다.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편에 서 있다면, 세상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속하였던 우리를 예수께서 택하여 세상에서 끄집어 내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사탄은 예수가 싫으니 예수쟁이들도 당연히 싫은 것이다.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면 안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정체성과 소속감을 분명히 해야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익숙함과 낯선 것이 있다. 세상에 있다면 예수가 낯설 것이고, 예수께 돌아왔다면 세상이 낯설 것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세상이 익숙치 않고 불편하다. 여기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우주가 아니라 죄악으로 물든 인간 세상을 가르키는 말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세상의 가치가 중요한게 아니라서, 그게 별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본문은 우리가 예수의 종이기에 박해를 받는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박해와 손해를 피할 비법이 있는데, 예수의 종이 아니면, 대충 믿고 적당하게 선을 그으면 된다. 그런데 세상에 살때에는 세상적으로 살면 된다. 그러면 박해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에서 예수의 자녀로 살아가려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즐긴다해도 우리는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게 믿음의 선택인지를, 주인되신 주님께서 기뻐하실지를. 본문에는 한가지 위로가 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진 못하다. 우리가 당하는 박해나 고난이 주님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를 위해 당하신 내 주님의 고초를 생각하면 내가 당하는 고난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3.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무식이 용감이라고, 모르니까 그런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사라졌다. 하나님도 두렵지 않은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지옥의 빗장이 풀린 것이다. 금기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 (렘 2:19)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모든 것을 상대주의 다원주의로 바꾸어 놓았다. 절대 가치가 없다는 것은 기준이 없다는 것이고, 기준이 없으면 사람들이 자기 소견이 옳은대로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핍박이 있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핍박이 없다면 무엇 때문일까? 성도에게 대한 세상의 박해와 핍박은 우리를 미워함이 아니라 예수를 미워함이다. 우리가 예수께 속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박해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한가? 예수 때문에 힘겨움이 있는가? 믿음 때문에 불편함이 있는가? 신앙 때문에 손해와 불이익이 있는가? 아픔과 괴로움과 억울함과 핍박과 박해가 있는가? 그런게 없다면, 우리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여서가 아니라, 내가 피하거나 타협하는 것은 아닌가?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극성스럽게 믿으니까 지탄을 받는거지, 오늘날은 다원주의 사회 아닌가? 요즘같은 첨예한 갈등 사회에서는 적당하게 믿고, 좋은게 좋은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의 종의 멍에를 벗어 던지면 핍박과 손해는 없다. 세상은 우리에게 침묵을 요구한다. 암묵적인 복종을 강요한다. 어디 동성애 이슈만 그런가? 세상은 기독교적인 죄의 정의에 대해서도 침묵하라고 한다. 사랑과 희생, 헌신같은 기독교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며 조롱한다. 자본주의의 성공신화야말로 우리시대 최고의 우상 아닌가? 오늘 우리는 뭐가 불편한가? 이러한 세상의 도전 앞에서 여러분들은 뭐가 불편하고 낯선가?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의 손길이 불편한가? 아니면 내 심사를 거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편한가? 유혹은 세상에만 있는게 아니라, 이미 내 안에도 들어와 있다.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한 유혹은 ‘쉽고 편하게’가 아닐까 싶다.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아졌는가? 많은 사람들은 여유를 갖기 시작했다. 아둥바둥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는, 쉽고 편한 세상이 온 것이다. 그렇다보니 넓고 편한 길을 찾게 되었다. 편하게 예수 믿고 싶다. 교양있게 품위있게 안락하게 쉽게... 세상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못들은체 하고 그 손길을 못본체 한다. 마무리 진리의 길을 걷다보면 고난과 역경, 이유없는 억울한 핍박과 박해를 당할 수도 있다. 고행주의는 아니지만, 쉽고 편한 길을 찾을게 아니라 그것을 뿌리치고 일부로라도 육체를 쳐서 복종케하고 조금은 불편하게 살아가는 연습을 해보자. 세상의 세속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고 복음을 따른다는 것은 생각없이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좁은 길을 걸어가고 의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지고 확장되고 완성될 것이다. 그게 고난의 길만은 아닌 이유는, 그 길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적인 안락과 편안함은 없을지 몰라도 하늘의 은혜와 평강으로, 주님의 복락으로 채우셔서 즐겁고 기쁘게 감사하고 자원함으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실 것이다. 우리 서로 격려하며 그 길로 함께 걸어가는 하늘가족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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