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5(주일예배) 핵심2. 진실한 공동체(엡 2:19) | 이기형 목사 | 2021-1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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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2. 진실한 공동체(엡 2:19) 몹시 추운 어느 겨울 고슴도치들이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몸에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서로를 찌르기에 고슴도치들은 놀라서 떨어져 앉았다. 하지만 조금 지나니 너무 추웠다. 그래서 다시 모여 들었다. 이번에도 가시가 서로에게 상처를 냈고, 또 다시 떨어졌다. 고슴도치들은 겨우내 이런 식으로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 세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너무 가까우면 상처를 받아 아프고 너무 떨어지면 춥고 외로워서 힘들다. 인간관계에도 안전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거리를 불가근 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한다. 심지어 교회 생활에도 불가근 불가원하라고 조언하는 분들이 있다. 그게 맞는가? 성경 어디에 있는가? ‘어짜피 사람 모이는데는 다 그렇고 그래. 어쩔 수가 없어’ 이런 냉소가 공동체의 열망을 꺼뜨리고 기대감을 접게 하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은 교회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있는가? 그게 없다면 너무 슬프고 불행한거 아닌가?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세워가는 우리 하늘가족교회의 두 번째 핵심가치는 진실한 공동체이다. 에베소서 2장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그의 몸인 교회를 만드셨고, 그 교회는 어떠한 특성을 가지는지 ‘그 때에’와 ‘이제는’라는 표현을 통해 보여준다. 1. 전에는 (Before) 예수를 만나기 이 전의 존재가 어떠했는지 1절을 보면,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었다. 여기 죽음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데, 세상 풍조를 따랐다. 우리가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은, 3절에서 내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내 마음에 원하는대로 내 멋대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밝혀준다. 그 때에 11절에서 하나님의 택함받은 선민이 아니라 이방인이었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표식을 나타내는 할례가 없는 할례받지 않은 무리들이었다. 12절에서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었고 외인이었다. 세상에서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었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고 자기 욕심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거 아닌가? 그리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성경에는 그런 삶을 사망이라고 단정지어 말씀한다. 지금 살아 있는데? 도살장에 있는 돼지가 먹을 것을 풍성하게 받아먹고 행복해 한다면, 그게 부러운 것인가? 뿌리가 잘려 화병에 꽂힌 화초가 아름답다해도 얼마나 가겠는가? 우리는 거기에서 구원을 받았다. 2. 이제는 (After)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4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 시민으로 유업을 받게 하셨다 어떻게 유업으로 받게 되었는가? 은혜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로 구원을 받았다. 은혜로 주어지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이 있었다(13절). 그럼 우리가 구원 받았으니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이제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가? 우리 안에 있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7절에서 가르쳐준다. 3. 어떻게? 예수 공동체 사도 바울은 여기서 말씀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삶을 공동체로 보여주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18절까지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는데, 무엇인가? 둘을 하나되게 하셨다고 하신다. 둘을 각자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되게 하셔서 한 나라의 시민이고 한 부모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여기 둘은 누구를 말하는가? 물과 기름처럼 너무나도 달라서 도저히 하나될 수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복음은 이 둘을 하나되게 하였다. 이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십자가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었다. 민족뿐 아니다. 예수 공동체는 유대인과 헬라인뿐 아니라 종과 주인, 남자와 여자를 하나되게 하셨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구한말에도 머슴이 있었다. 어떻게 주인과 머슴이 하나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예수 공동체의 복음의 능력 아닌가? 그들에게는 고슴도치 가시가 없었을까? 우리 안에 가시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아담의 죄로 인해 아름다운 피조 세계가 황폐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시기 질투 미움 분노 폭력 증오 의심 멸시 차별, 이런 가시들은 죄의 부산물이고 죄의 무기들이다. 이 가시가 어떻게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죄로 인해 황폐한 심령에 백합화가 피고 무성하게 피어나는 것은 메시야의 도래이다(사 35:1-2)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어린 싹이지만, 그는 열방을 돌아오게 하는 메시야로서 임하실 것이다. 가시나무를 대신해서 잣나무가, 찔레를 대신해서 화석류가 날 것이다. 메시야가 오시면, 메시야 왕국이 시작되면 에덴은 회복될 것이다. 그 메시야 왕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아직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아 가시도 남아있고 날카로운 모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수록 가시는 무디어지고 모난 부분도 부드러워진다는 사실이다. 예수 보혈은 우리의 연약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기에, 예수 공동체는 모든 상처를 치료해 낸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평행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되는 공동체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일까? 이제는(after)가 아니라 여전히 전에는(before)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전에는, 특징이 무엇인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다. 교인이 되었어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회심이 없다면 예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없다. 무엇이 둘을 하나되게 하는가? 예수 십자가와 성령이다. 그 공동체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19절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가족이 아니면서 가족이라 우긴다면 사기가 아닌가? 사기치지 말고 하늘가족교회라는 이름에 걸맞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는 함께 지어져 간다. 나 혼자 독불장군 아니다.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구원은 개인이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자녀가 된 이후에는 가족으로 공동체로 살아간다. 함께 지어져간다. 그것이 교회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핏값으로 교회를 사셨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꿈이고 세상의 희망이다. 우리가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다면, 그 교회 진실한 공동체 우리가 함께 이루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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