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7(주일) 울지말라 (눅 7:11-16) | 이기형 목사 | 2021-10-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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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7:11-16절 개역개정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울지 말라(눅 7:11-16) 큰 고통이나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울지말라고 함께 기도하겠다고 위로한다. 마음이 없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바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지만, 사람의 말이라는게 잠시는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그 고통스런 현실로 돌아오면 공허하게 사라질 뿐이다. 참된 위로와 기쁨은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후에 나인성으로 가셨다. 성문 가까이 다가갔을 때 주님은 성을 빠져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누가는 죽은 자는 외아들이요 그 어미는 과부라고 밝혀주고 있다. 아무리 호상이라해도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과부의 외아들이랴.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 과부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서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과 절망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나마 아들이 있어서 살아갈 의지가 되었고 살아갈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청년의 때에 죽었다. 이제 그녀의 소망도 존재 의미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일찍이 보내고 이제는 남은 자식마저 보내야 하는 이 과부의 고통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어떻게 위로한들 그것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진실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는 무능력하고 공허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죽음의 행렬과 상여는 바로 우리의 인생일 수 있다. 상여를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을 하지만, 요즘은 대단한 리무진에 금박으로 관을 장식하지만,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그 안에 아무리 대단한 금은보화와 부귀영화 권력과 명예가 있어도, 죽고 못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한 줌 흙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허무 아닌가? 그 잠시 들리는 여정에 정들었던 마을이 있고 존경받았던 직장이 있다해도 결국은 묘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누가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춰 세울 수가 있겠는가? 무리들과 함께 나인성으로 들어가시던 주님은 그 장례 행렬의 과부를 보셨다. 그럼 주님이 무엇을 보셨는가? 남편없이 자신의 모든 꿈과 소망을 담고 의지했던 외아들을 잃은 한 과부를 보셨다. 절망의 고통을 부여잡고 묘지를 향해 발을 내딛는 그 아픔 마음을 보셨다. 그렇기에 주님은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고통과 슬픔의 현장으로 가까이 가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울지말라” 그것이 의례적인 말이었다면 그 말은 아무런 위로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울도록 내버려 두는게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했다. 단지 말로만 울지말라 하신게 아니라 울지 않도록 울 필요가 없게 주님은 행동하실 것이다. 울지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셔서 관에 손을 대신다. 죽음의 행렬을 그 손으로 제지하신 것이다. 그리고서 말씀하신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은 시체에게 얘기할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들 시체가 들을리 만무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그 죽은 청년이 반응한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을 하는 것이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의 주님이라는 사실이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가장 강력한 능력인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진리를 우리의 심령에 새기고 일상에서 붙들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공허하다. 예수믿어 세상에 부귀영화를 누린들, 부활과 생명의 소망을 갖지 못한다면 일장춘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가장 놀라운 능력은 무엇인가?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무덤에 갇힌 것처럼 죽음에 에워싸여 살아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그 무덤에서 살아날 것이다. 불공평한 억울한 인생을 살고, 이루지 못한 꿈과 좌절된 한을 품고 죽었을지라도, 죄악된 세상에서 의를 위해 살다가 결국은 아무런 댓가를 누리지 못하고 인생이 끝났을지라도, 그게 끝이 아닌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천군 천사의 호령과 함께 다시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볼 말씀이 있는데, 나인성 과부가 어떻게 했길래 죽은 아들을 생명으로 돌려받을 수 있었을까? 죽은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할게 있겠는가? 심지어 대신 죽어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까? 도대체 이 과부는 무엇을 하였는가? 본문을 보시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과부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그녀의 주변 사람이 요청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 죽은 청년의 관으로 다가가셔서 거기에 손을 대시고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셨다. 그것은 본문이 밝혀주는대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오직 예수님 자신의 동정과 자비로 행하셨다. 과부의 어떤 행함이 아닌 오로지 주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녀에게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슬픔속에 있는 비참한 현실 뿐이었다. 그 현실 속에 주님은 찾아 오셨다. 그리고 죽음의 탄식을 생명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다. 우리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어떠하든지 용납되고 주의 긍휼을 입는 것, 그것은 오직 은혜이다. 그 은혜를 힘입어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죽음의 고통속에 무덤을 향해 나아가는 나의 여정에 주님은 오늘도 찾아오신다. 눈물 속에 고통으로 몸부림할 때 주님은 ‘울지말라’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사람의 공허한 위로가 아니라 울지 않게 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생명의 주님의 말씀이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설움과 절망으로 닫힌 그 죽음의 관에 손을 대시고 ‘일어나라’ 말씀하신다.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기쁨이 되겠는가? 주님의 그 말씀이 아닌가? 그 말씀과 함께 그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세상에 돌아가 우리를 살리신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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