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6(주) 무력(武力)은 무력(無力)합니다(마 26:50-54) | 이기형 목사 | 2021-09-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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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6:50-54절 개역개정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무력(武力)은 무력(無力)합니다(마 26:50-54) 캐나다 의회는 올해부터 9월30일 오렌지 셔츠 데이를 ‘진실과 화해의 날(National Day for Truth and Reconciliation)’로 명명하면서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오렌지 셔츠 데이는 기숙학교 생존자인 필리스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녀는 6세에 기숙학교에 끌려가면서 할머니가 선물한 소중한 오렌지 셔츠가 벗겨지고 다시는 돌려받지 못한 아픔을 토로하면서 오렌지 셔츠는 기숙학교가 어떻게 원주민 어린이의 정체성과 문화와 언어와 전통과 자존심마저 약탈해 갔는지를 상징하는 징표가 되었다. 캐나다의 기숙학교는 1880년에서 1996년까지 약 100년동안 운영되었는데, 1867년 독립한 캐나다 정부는 원래 주인(First Nations)들을 '울타리(reservation)'에 가두고 분리시켰다. 뿐만 아니라 미개한 이들을 문명화시키고 계몽한다는 미명하에 모든 원주민 자녀들을 가정으로부터 분리시켜 그들의 문화 종교 관습 언어 대신 백인들의 우월한 문화에 동화하도록 강제 교육을 실시했다. 1880년, 15만명의 캐나다 원주민 자녀들은 캐나다 정부의 명령에 따라 139개 시설의 기숙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기숙학교 제도는 연방 정부의 정책이었지만, 대부분의 학교들은 종교 기관에 의해 위탁 운영되었다. 가톨릭교회가 60% 이상, 그리고 영국성공회, 연합교회, 장로교회 등이 운영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는 엄격하고 무자비한 교육을 실시했고 구타 징벌 성적 학대가 만연했다. 원주민 기숙학교 생존자는 8만명 정도라는데, 이들은 언어적·신체적·정서적·성적 학대를 당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현재 원주민들은 캐나다 전체 인구의 4% 내외이며, 이 중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17%에 불과하다. 대도시 노숙자의 70%는 원주민들이며, 자살률은 백인의 20배에 이른다. 원주민 보호 구역에 사는 원주민의 80%는 술과 마약에 중독돼 있다. 기숙학교는 한 민족을 파괴한 것이다. 이러한 죄악에 대해 1986년 연합교회가 최초로 기숙학교에 대해 사과를 했다. 뒤이어 성공회와 장로교회가 사과하고 2009년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사과했다. 2008년에는 Stephen Harper 총리가 정부를 대표해서 사과하면서 캐나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The Truth and Reconciliation of Canada)를 만들어 기숙학교를 통하여 발생한 학대와 가혹 행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2015년에 보고서를 발간하였는데, 이 보고서를 통해서 기숙학교가 원주민의 문화 학살 행위를 자행했다고 인정했고 그 권고 사항에 따라 올해부터 진실과 화해의 날이라는 기념일로 지켜지게 되었다. 기숙학교를 운영했던 교파들은 모두 사과했다. 교회는 무엇을 뉘우쳤고 무엇을 사과했을까? 폭력과 학대, 성적인 범죄, 비위생적인 환경.. 모두가 범죄 요건이다. 당연히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보다 무서운 보이지 않는 감춰진 진실, 이러한 그릇된 범죄가 나오게 된 그 바탕은 무엇일까? 정말 뉘우쳐야 하는 것은 복음의 방법이 아니라 힘의 논리, 무력을 사용한 제국주의적인 발상이 아닐까?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말미에 체포되시는 광경이다. 성전을 지켜야 하는 경비대장들이, 바리새인들의 하인들이 칼과 곤봉 무기를 가지고 무력을 동원해서 불법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하였다. 유다는 사랑과 존경의 표시인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겼다. 이렇게 무력을 동원하여 예수를 체포하려 할 때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베드로가 나서서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고 무리를 막아선다. 이런 베드로를 보시고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면 결국 자기도 검 곧 무력으로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다. 무력을 쓸거라면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그렇게 체포당하신게 아니었다.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주님은 못하신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력을 쓰는 자는 무력으로 망하거니와 성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는가? 열두 군단되는 하늘 군대의 무력(武力)이 아니라 무력(無力)한 무기력한 십자가에서 죽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그를 높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다. 죽음으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다. 이것이 죽어야 산다는 기독교의 진리 아닌가? 세상은 죽으면 끝이라고,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팽개쳐진다고 말하지만, 진리는 죽으면 새로운 시작으로 살고, 헌신하면 주님께서 갚아주시고 희생하면 주님께서 살려주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력을 가르쳐 주신 적이 한번도 없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그럼에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은 힘을 가진 무력(武力)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무력(無力)하나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의 능력으로 승리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믿고 의지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능력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능력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주의 일을 이루어가려 하고, 무엇이 없어서 아쉬어 하는가? 우리는 100여년전 캐나다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개종시키려 했던 교회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진 않는가? 그 당시 기숙학교를 감당헀던 교회의 목사와 신부들은 미신에 사로잡힌 미개한 원주민들을 거룩한 복음으로 개조하는데 거룩한 선교적인 사명감이라는 명분과 열정을 가지고 헌신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참혹한 죄악을 일말의 양심의 가책조차 없이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라고 포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선교의 미명아래 자행되는 크고 작은 범죄들이 있다. 무례한 기독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다. 기독교(Christianity)와 제국(kingdom)이 결합하여 생겨난 체제를 크리스텐돔(Christiendom)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고 권력을 거머쥐었던 로마 제국의 추락을 보고서도 여전히 헛된 하나님 나라를 꿈꾼다. 오늘날도 그 실패한 기독교 제국주의를 꿈꾸는 이들이 너무 많다. 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면 얼마나 좋겠냐고 순진한 꿈을 꾼다.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권력을 이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낮은 자리를 향하셨고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 주님은 무력(無力)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지만, 오늘날 교회는 무력(武力)의 십자군으로 만들어서 세상을 정복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역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오늘날 권력과 재력, 규모와 재산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이려 한다.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한 제국치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제국이 없다. 역사가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무력(武力)은 무력(無力)하다는 것이다. 주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하셨으니, 무력은 무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세상은 십자가와 복음이 무력하다고 무시하지만, 참된 능력은 그 십자가와 복음이다. 그 능력으로 살아가시는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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