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13(주) 어쩜 이렇게 그대로세요? (엡4:13-16) | 이기형목사 | 2021-06-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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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4:13-16절 개역개정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어쩜 이렇게 그대로세요?(엡 4:13-16)
오랜만에 3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만나보니 정말 격세지감이 있다. 아이들은 자랐지만 노년층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팔순의 아버지는 희끗했던 머리가 순백의 백발이 되고 얼굴의 주름도 늘고 체구는 더욱 왜소해졌다. 전에는 지팡이에 의지하시더니 이제는 휠체어에 앉으셨다. 아이가 자라는 것은 기쁨이지만, 나이드신 분들이 더욱 노쇠해지는 것은 서글픔이다. 그렇다고 ‘몇 해 못 본새 왜 이리 늙으셨어요?’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쩜 이렇게 그대로세요? 예전과 변한게 조금도 없어요. 어떻게 관리를 하시면 늘 그대로일 수 있나요?” 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마음 한 구석은 아프고 시리다. 우리의 신체 싸이클은 생성소멸의 원리 가운데 언젠가는 사라져 갈 것이기에, 그대로 있다는 것만으로도 덕담과 위로가 된다. 그럼 우리의 영적 사이클도 이처럼 생성소멸의 원리의 지배를 받는가? 아니다. 영혼불멸, 영혼이 육체처럼 늙어가고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영혼의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의미한다. 그런데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다시 태어났다. 회심을 통해 중생 거듭난 것이다. 그러면 새롭게 태어났으면 그것으로 끝인가? 출생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아기는 태어나고 발달 과정을 거쳐 성장한다. 그렇게 성장하다가 어느샌가 성장을 멈추더니 쇠락으로 꺾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인생 곡선이다. 영적 출생도 마찬가지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자라듯이 영적인 생명도 자라가야 한다. 그럼 영적인 생명도 멈출 때가 있고 쇠하여지기에 붙들고 있는거 만으로도 잘하는 것일까? 영적으로도 “어쩜 그렇게 그대로세요? 어떻게 영적 관리를 하시기에 늘 그대로일 수 있나요?”라는 말이 덕담이고 칭찬일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우리 주변에서 “사람은 어지간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예수 믿어도 성품은 바뀌지 않는다더라’ 혹은 ‘예수 믿어도 사람은 안변하더라’는 이야기를 한다. 목회자들마저 사람은 안변한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왜 그리스도인들은 변하지 않고 어쩜 그렇게 그대로일까? 구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도 없지 않다. 여러분은 지금 죽으면 천국갈 확신이 있습니까? 그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요 5:24)의 말씀, 영생을 얻었고! 과거형으로 이미 끝난 일이다. 생명으로 옮겼다 역시 과거형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구원을 끝나버린 사건으로 이해하면 더 이상 세상에서 할 일이 없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은 구원을 편협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구원은 이미 끝난 과거형도 있지만, 현재형(빌 2:12)도 있고 미래형(딤후 4:18)도 있다. 거듭나고 새롭게 태어났다면 그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자라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성숙하고 온전한 인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변하지 않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에 대해 말씀 나누려고 한다. 1. 자라가라 (엡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가 새롭게 태어났다면 그건 완성이 아니라 시작과 출발이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영성은 자라가야 한다. 2. 자라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1) 어쩌면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태어났다면 더디든 빠르든 성장할텐데, 성장하지 않고 있다면 뒤집어 생각해 볼 때 태어나지 않은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는 것이다. 영적인 출생을 중생 거듭남 회심이라 하는데, 교회 안에도 회심이 없는 교인들이 있을 수 있다. 2) 또 다른 이유는 돌봄이나 양육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기준이 되고 자기 하고 싶은 자기 멋대로 살아간다면 자기 왕국 자기만의 우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갈 것이다. 훈련하지 않았으니 그저 옛 습관대로 본성대로 살아가면서도 구원받았다고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14절에 어린아이의 특징을 언급하고 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요동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것이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 성장할리 없다. 3. 어떻게 자랄 수 있는가? 1) 먼저는 믿음,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회심하여 거듭나는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그 믿음은 알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알아야 믿을 수 있지,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다. 2) 양육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가정이다. 하나님의 가정이 어디인가? 교회 공동체이다. 이 두가지 요건을 충족하는데도, 곧 회심하고 건강한 공동체 안에 있음에도 성장하지 않는다면 이건 정말 놀라운 기적이다. 여지껏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정말 신기한 기적과도 같다. 예수 믿어도 사람은 안변한다고? 그럼 무엇 때문에 죽은 예수를 믿는가? 예수 믿어도 변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어떻게 우리에게 자라가라고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가? 예수 믿으면 변하게 되어 있다. 예수 믿으면 자라게 되어 있다. 그 안에 회심하여 예수의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이 건강한 공동체 안에 있어 양육을 받는다면! 아이들이 자라는 것은 부모의 기쁨입니다. 성도의 믿음이 자라는 것도 하늘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날마다 속사람이 성장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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