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8(주) 인생의 풍랑 가운데서 (행 27:20) | 이기형목사 | 2021-04-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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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항해에 비유할 수 있겠다. 아름다운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있겠고, 한가하게 크루즈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먼 바다에서 폭풍과 싸우며 힘겨운 밤을 지새는 새우잡이로 고전분투하는 사람도 있겠다. 호수의 뱃놀이는 안전하지만, 바다의 항해는 때로 분노하며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사나운 얼굴을 만날수도 있다. 그 위기는 왜 찾아오고 어떻게 넘길 수 있을까? 사도행전 27장은 죄수로 로마를 호송되는 바울 일행이 나타나고 있다. 바울 일행의 항해는 순조롭지 못했다. 이 시기는 항해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항해를 강행했다. 처음에는 순풍을 만났지만, 얼마 안되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되었다. 이 광풍 앞에 바울의 탄 배는 속수무책이 되었다. 화물도 배의 기구들도 다 포기했지만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 있지 않을까? 누구의 바다든지 삶은 치열하다. 죽느냐 사느냐 생존이 달려 있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중도에 침몰할지 늘 긴장의 연속이다. 바울 일행은 왜 이런 광풍을 만나게 되었는가? 1) 백부장이 하나님의 사람의 바울의 말보다, 경험과 지식을 앞세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바울은 이 항해에 대해 경고한 바 있지만, 백부장은 경험과 지식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다. 선장은 그야말로 바다의 사람이 아닌가? 정기 화물선인 이 배를 이 코스에서 얼마나 운행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항해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닌가? 그런데 결과는 선장과 선주의 참패였다.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댓가는 혹독했다. 우리도 때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더 앞세우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2) 합리주의와 편의주의에 대한 맹신 때문이다. 미항은 작은 항구라서 276명이 겨울을 나기에는 부족했다. 불과 64km만 더 가면 넓은 항구가 있으니 거기로 가는 것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합리적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을 살리게 될 믿음이 사람 바울의 주장을 꺾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들은 한 겨울 편하자고 떠났다가 죽을 고생을 치루고 있다. 쉽고 편하게 살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평안한 삶이다. 3) 다수의 의견을 따르다가 어려움을 만난 것이다. 선장과 선주, 그리고 선장을 따르는 선원들도 출항하자고 말했을 것이다. 다만 바울 혼자만 항해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백부장은 다수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다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다. 대중, 군중 무리를 따르는 것을 유행이라고도 하고 대세라고도 한다. 유행이나 대세는 숫자이지 진리는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숫자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 그런데 이렇게 보는 것은 사실 인과 관계의 오류이다. 백부장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아서 폭풍을 만난 것은 맞다해도 그것은 현상이지 이유가 아니다.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할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하고,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기 보다는 마땅한 길을 선택해야 하고, 군중 심리와 유행에 따라가기 보다는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울 수는 있지만, 그 선택을 했다해서 폭풍이는 바다가 잔잔한 호수가 될까?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만날 때 이유를 찾는다. 성급하게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을 돌리려 한다. 과거의 판단이 잘못된 것으로 후회하기도 한다. 숱한 가정을 해보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졌을까? 호수에서 뱃놀이나 하는 인생은 폭풍을 만날리 없고 그래서 그 인생을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러라고 우리 인생을 이 세상에 보내신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나아갈 때 폭풍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벌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만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때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다. 예수님과 함께 호수를 건너는 제자들도 풍랑을 만나지 않았던가? 그 고난의 시간에 우리의 시선이 가야 하는 곳은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 영혼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면서 깊은 나락에 빠지기도 하고 취한 자와 같이 비틀거리기도 한다. 그 지각이 혼돈 속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할 수 있다. 그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죽을거같은 폭풍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구원의 희망마저 끊길 때, 원인을 찾기보다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고난 가운데 낙심과 좌절하며 원인을 찾다보면 원망과 불평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침몰한다. 원인은 그게 아니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이런 일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에 그 고통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가장 급선무로 부르짖는 자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해 내실 것이다. 그리고 광풍을 향해 고요하라 잔잔하라 꾸짖고 그 물결을 잠재우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 인생 항해의 선장되신 여호와께서 나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이다. 지금 내 눈에는 소원의 항구가 보이지 않고 사납게 몰아치는 폭풍만 보일지라도, 바울은 말한다. (행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도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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