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07(주) 공평과 은혜, 당신의 선택은?(마 20:1-16) | 이기형목사 | 2021-03-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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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0:1-16절 개역개정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흔히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알려진 이 말씀의 목적은 천국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천국은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는 주인과 같다고 하신다. 그럼 그 주인에 대해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하겠다. 주인은 특이하다. 포도원의 청지기가 있음에도 직접 그 이른 시간부터 인력 시장에 나온 것이라든지, 시간 될 때마다 나와서 품꾼을 쓴다든지, 심지어 오후 5시에도 품꾼을 쓰는 것이 그렇다.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품꾼들에게 일 자리를 주려고 한다. 자본주의 가치관을 가진 똑똑한 주인이라면 굳이 품꾼들을 더 고용하지도 않을 것이고 늦은 시간에 취업에 실패한 무능력자들을 고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은 취업에 선택받지 못한 실업자들의 아픔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생활의 궁핍함과 고통도 알고 계셨다. 포도원 주인의 배려는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그냥 적선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하기를 원했지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었다. 주인은 일 자리를 마련해주고 땀 흘린 댓가를 받아가도록 체면을 세워 주신다. 비록 그들은 한 시간밖에 일을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들도 내일을 살아가려면 하루 품삯이 필요했다. 한 시간 품삯으로는 하루를 살아갈 수 없다. 주인의 배려는 선택받지 못한 자에게 일 자리를 줄 뿐 아니라 필요한 하루 품삯 한 데나리온을 준다. 그건 주인에게 엄청난 손해였다. 그럼에도 주인은 경제논리로 품꾼들을 대하지 않으신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주인은 이런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셨을 것이다. 자본논리, 경제논리가 아닌 은혜논리, 천국논리가 있다. 그래서 먼저 온 사람에게 품삯을 줘어 보내지 않고 나중 온 사람부터 삯을 주었던 것이다. 절박한 처지의 사람들을 품고 함께해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은 이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주인에게 반기를 들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인과 가장 오랜 시간 일한 어떻게 보면 충성을 다한 일꾼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그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 시간 일한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12배나 더 일한 자기들에게 어떻게 그 사람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줄 수 있느냐,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구나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런 처지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럼 그들은 일한대로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했는가? 주인은 그들과의 계약을 어겼는가? 아니다. 주인은 그 약속을 온전히 지켰다. 유일하게 계약한 사람들이고 계약대로 지켰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가? 이들도 처음에는 주인이 자기를 뽑아준 것에 대해 감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당한 댓가임에도 남들과 같은 보수를 받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나를 저런 사람과 같이 대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남과 비교하면서 그는 고마움 대신 주인의 불공평한 처사를 비난하게 되었다 주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의식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저 사람이 기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 되고 만다. 어쩌면 포도원에 늦게 들어온 사람은 경쟁 상대도 못되었다. 누구도 고용해주지 않는 열악한 조건과 약점이 있었을 것이다. 경쟁 속에서 탈락하고 낙담한 사람, 어쩌면 더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면서도 연약한 이들을 나와같이 대우하는 그 은혜에 함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성도들이다. 거기가 교회이다. 처음 일꾼들에게는 결여된 것은 굶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선택하여 일자리를 주신 그 분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다. 그런데 그 감격이 사라지니 자기의 공로의식이 나오고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작동하고 남들보다 더 받아야 한다는 흥정의식이 발동한다.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은혜이다.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자본주의 논리에서 아예 은혜라는게 없으니 충돌할 일이 없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교회에서는 성도들은 은혜의 원리가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 낯설기만 하다. 나에게 주어지는 관대한 은혜는 즐겁고 기쁘지만 감동인데, 남에게 주어지는 관대한 은혜는 화가 나고 분노하게 한다. 나에게는 은혜가 적용되기를 바라지만, 남에게는 공평의 잣대를 들이댄다. 우리가 이 비유를 듣고 분노한다면 먼저온 사람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고, 우리가 감격한다면 나중 온 사람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여러분은 먼저 온 사람인가? 나중 온 사람인가? 여러분이 먼저 온 사람이라면 주님은 당신의 헌신과 수고를 잊지 않고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이다. 주인은 인색한 분이 아니라 풍성한 분이다. 천국의 상급이 모두 한 데나리온으로 동일하다고 생각지 말라. 그럴리 없다. 1시간 일한 사람에게 하루 품삯이라면, 12시간 일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풍성하게 주실지 기대하라. 그러나 그것은 자기 공로나 의로 내세우고 당연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하게 더 받을줄 알았던 이른 아침의 품꾼들의 착각이 원망과 분노를 불러왔다. 당연한게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내 공로가 아니라 은혜임을 붙드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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