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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제7장. 수도원 제도의 빛과 그림자 운영자 2018-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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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수도원 제도의 빛과 그림자    18.8.24()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함으로써 지하에 숨어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이전에 박해받던 교회는 이제 특혜를 누리는 집단이 되었다. 이런 상황의 변화를 모든 사람이 기뻐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공인으로 말미암아 이전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는 진실한 신자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신자들이 양산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이 좁고 험한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넓고 편안한 영광의 길로 변해버린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사람들은 수도원운동에서 교회의 희망을 찾고자 하였다.

이집트의 사막은 바로 이 수도원 운동의 요람이었다. 수도사(monk)라는 단어는 고독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모나코스(monachos)에서 유래하였다. 수도사들에게 하나님과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바로 고독한 사막이었던 것이다.

 

안토니오스 (Antonios, 251? - 356)

수도원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토니오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20세가 되던 해에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이를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리고 평생을 무덤에서, 동굴에서, 사막에서 고독한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안토니오스는 자신이 묻히는 장소를 비밀로 하고 자신의 전 재산인 겉옷 한 벌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오스(Athanasios 295?-373)에게 전하라고 유언하였다. 아타나시오스가 쓴 성 안토니오스의 생애는 안토니오스의 수도생활에 대해 잘 알려주고 있다.

지금도 1,700년의 역사를 지닌 성 안토니오스 수도원에 수사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역사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다.

 

파코미오스 (Pachomios, 292? - 346)

안토니오스나 파울로스가 고독한 수도생활을 한데 비해, 파코미오스는 처음으로 공동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파코미오스의 수도원에 가입하려면 누구나 전 재산을 포기하고, 규율에 절대 복종하며, 상호봉사의 원칙에 따라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식생활에서 고기는 일체 금지되었다. 수도사들의 일상생활은 노동과 예배로 이루어졌다.

경건생활의 이상으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채택하여, 빵을 굽거나 농사를 지으면서도 시편을 노래하고 성서구절을 암송하며 소리내어 혹은 침묵으로 계속 기도하였다. 파코미오스의 수도규칙은 히에로니무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널리 소개되었는데, 동방 수도원제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Basileios, 329-379)수도규칙과 서방 수도원 제도의 아버지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480?-547?)수도규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마르티누스 (Martinus, 316-397)

수도원의 이상을 일반화시키는데 가장 뛰어난 모범을 보인 인물은 마르티누스였다. 세베루스(Sulpitius Severus)가 쓴 성 마르티누스의 생애는 수세기에 걸쳐 서유럽에서 가장 널리 읽힌 영향력 있는 책이었다.

마르티누스가 군인으로 있던 어느 날 헐벗고 병든 거지를 만났다. 당시 가진 돈이 없었던 마르티누스는 자신의 군용외투(cape,cappella)를 벗어 반으로 잘라 그 한쪽을 거지에게 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 후 군용 외투 반쪽을 걸친 예수님이 마르티누스의 꿈속에 나타나 나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자에게 베푼 것은 곧 나에게 베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바로 이 사건에서 현재 우리가 작은 교회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채플’(chapel)이라는 말이 유래되었고,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를 뜻하는 채플린’(Chaplain)이라는 말도 생겼다.

후에 마르티누스는 투르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는데, 감독이 된 뒤에도 그는 수도원적인 생활태도를 유지하였다. 그의 명성과 모범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감독이라면 바로 마르티누스와 같아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 감독들의 세속성과 사치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수도원 운동이 결국 성직제도가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베네딕투스 (Benedictus, 480?-547?)

동방 수도원과 서방 수도원이 다른 점은, 첫째로 자기부인이라는 전제 하에서 육체를 정벌하는 대신 서방 수도원 운동은 세상에서의 선교를 위해 영혼과 아울러 육체를 훈련하고자 했다. 둘째로, 처음부터 서방 수도원운동은 공동체 내에서의 생활을 추구했다. 마지막으로 서방 수도원운동은 동방의 수도원운동처럼 교회의 지배층과 계속적인 갈등을 겪지 않았다. 기존 성직 계급이 극도로 부패했을 때를 제외하고 서방의 수도원운동은 교황들, 주교들, 그밖에 다른 교회 지도자들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했다.

서방에서 수도원 제도를 확립한 사람은 이탈리아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이다. 베네딕투스가 529년에 세운 몬테카시노(MonteCassino) 수도원은 베네딕투스회의 모체이자 본부가 되었다. 베네딕투스의 위대성은 그가 공동체를 위해 작성한 수도규칙(Rules)에 있다. 이는 서방 수도원의 기본 뼈대를 결정지었다.

수도규칙은 극단적 금욕주의 대신에 비록 엄격하기는 하지만 지나치지 않은 질서와 규범을 통한 지혜로운 수도 생활을 추구한다. 사막에 살던 많은 수도사들이 빵 소금 그리고 물만 먹고 생활했는데, 베네딕투스는 자기의 수도사들이 하루에 두 끼씩 올바른 식사를 하게 했다. 또한 두 가지 요소, 즉 정주(定住)와 순명(順命)을 가장 중요시했다. 정주는 수도사들이 마음대로 수도원을 옮길 수 없고 이전 명령이 없는한 종신하였다. 순명은 규율과 수도원장에 대한 순종 역시 지체 없이행해져야 했다.

베네딕투스는 기도가 수도생활의 핵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하루에 8(조과, 찬과, 1시경, 3시경, 6시경, 9시경, 만과, 종도 - 시편의 낭송과 성경 강독으로 이루어졌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를 거행하는 것을 성무일과(聖務日課)라고 부른다.

베네딕투스는 수도생활에서 기도와 더불어 노동을 강조하였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표어는 모든 베네딕투스회 수도사들의 기본 정신이었다. 베네딕투스회 수도사들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순번을 정해 공평하게 일하였다. 수도원 내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해당 공동체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에 따라 결정하였다.

수도사들은 성경 및 기타 서적들을 필사하는데 익숙해졌으며, 이것들은 후대를 위해 보존되었다. 또한 수도원들은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특히 수도사 교육을 받기 위해 맡겨진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부유층이 육체노동을 천한 것이라고 멸시했던 사회에서 수도원은 뛰어난 지성과 영적 작업이 고된 육체노동과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서약을 했는데, 첫째는 수도회에 영구히 귀의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발적 가난과 정절을 지키겠다는 것이고, 셋째는 대수도원장에게 절대 복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베네딕투스 수도회는 질서를 유지하면서 영속성을 지닐 수 있었다. 수도사들은 고깔이 달린 검정색 겉옷을 입었고,.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해가 진 후 잠들 때까지 예배와 기도, 독서, 노동으로 꽉 짜인 일상을 보냈다. 매일이 경건의 생활이라 여겼기 때문에 이들은 주일도 다른 날과 똑같이 보냈다.

 

클뤼니 수도회

초기 수도원의 순수한 이상은 시간이 가면서 점차 무뎌졌고, 교회는 물론이고 수도원까지도 신앙의 거점이라기보다는 어두운 미신의 온상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락하고 부패한 교황청과 수도원에 일대 개혁의 바람을 불러 일으킨 것이 바로 클뤼니(Cluny) 수도원 운동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910년 아키텐의 공작인 기용(Guillaume de Aquitaine)이 자신의 사냥터였던 클뤼니를 수도원 부지로 제공하면서 출발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덕망 있는 수도원장들은 모든 성직자가 독신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가장 시급하게 근절해야할 문제로 성직매매를 꼽았다. 이들의 지도아래 클뤼니 수도원은 베네딕투스의 규율을 온전히 따름으로써 개혁의 불을 지폈다.

클뤼니 수도회는 점차 성장하여 한때 클뤼니에 400명이 넘는 수도사가 살았다. 12세기 중엽에는 최전성기를 맞아 전 유럽에 1,500개의 분원이 생겨날 정도로 큰 세력을 이루었으며, 이 수도회에 속하지 않은 수도원들조차 클뤼니회의 수도 관습을 채택하는 곳이 많을 정도였다.

이 수도회의 대수도원장 중에서 오도, 마욜루스, 오딜로, 위그 등 4명이 성인의 반열에 올랐고, 그레고리우스 7, 우르바누스 2, 파스칼리스 2세 등이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정도로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13세기부터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해 시토 수도회에 개혁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클뤼니 수도회는 그 후 계속 쇠락의 길을 걷다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790년 해산당하였으며, 현재는 과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약간의 유적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클뤼니 수도회가 베네딕투스의 규율에 철저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베네딕투스의 규율과 다른 면도 있었다. 베네딕투스에게 육체노동은 영성생활만큼 중요한 것이었지만, 클뤼니 수도회에서는 수도사가 노동에서 떠나 영성생활에만 전념하는 것을 보다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어쩌면 육체노동과 영성 생활을 나눈 이 점이 바로 수도원운동을 본래의 궤도에서 이탈시킨 주범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클뤼니 수도회는 베네딕투스와는 달리 가난의 문제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수도원의 재산 축적을 용납함으로써 개혁운동의 실패에 가장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시토 수도회

사토(Citeaux)회는 베네딕투스의 수도규칙에 충실하고자 한 또 다른 수도회였다. 시토 수도회는 1098년 로베르투스(Robertus)에 의해 부르고뉴의 디종 근처 시토에서 개원한 수도원에서 비롯되었다.

베네딕투스회 수사들의 복장은 검정색, 클뤼니 수사들의 옷은 흰색이었던 반면, 시토회의 복장은 회색이었다. 시토 수도회는 12세기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mard of Clairvaux, 1090-1153)라는 걸출한 인물로 인해 크게 융성하였다. 시토회를 종종 베르나르파라고 부를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베르나르는 1113년에 시토 수도회에 가입한 뒤 수많은 수도원을 세웠으며,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와 신학적 논쟁을 벌였고,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였으며, 교황청보다 높은 권위를 바탕으로 교회개혁을 주도하였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를 성인인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교회박사 (Doctor Ecdesiae)로 선언하였다.

신학적으로 베르나르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지만, 몇 가지 점에서는 로마교회의 입장에서 벗어날 만큼 자유로운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그는 마리아의 무원죄 영태설을 부정하였고, 세족식을 성례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였으며, 세례 받을 기회가 없을 경우 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베르나르는 또한 그리스도에 관한 명상에 전념한 신비주의자였다. 베르나르가 작시한 찬송시 중에서 3곡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 포함되어 있는데 85(구주를 생각만 해도), 145(오 거룩하신 주님), 262(날 구원하신 예수님)이 그것이다. 3곡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이다. 이와 같은 베르나르의 그리스도 중심성 때문에 종교개혁자 루터조차도 베르나르가 수사서약보다는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더욱 의지했다고 높이 칭송하였다. 또한 루터는 자신이 설교에 참조하는 모든 박사 가운데 베르나르가 가장 뛰어나며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도 능가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를 가장 훌륭하게 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수도사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던 루터도 베르나르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사랑했다"고 말할만큼 베르나르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비주의자였다.

시토 수도회는 베르나르 외에도 2명의 교황 유게니우스 3세와 베네딕투스 12세를 배출하는 등 중세시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3세기로 접어들면서부터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쿠스가 세운 탁발(托鉢) 수도회들의 왕성한 활동의 그늘에 가리게 되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클뤼니회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받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

이 위대한 수도회의 창설자인 프란체스코(Francesco, 1181?-1226)의 본명은 지오반니(Giovanni)이다. 그의 아버지가 프랑스와 상거래를 하였고 어머니는 프랑스 여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는 그를 작은 프랑스인, 프란체스코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지오반니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철저한 자발적 가난과 이를 통한 기쁨의 생활을 추구하였다. 프란체스코는 1 209년에 뜻을 같이하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삶의 방식이라는 수도 회칙을 정하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구두 허락을 받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에 수도 회칙을 개정하여 1223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게서 정식으로 수도회 인가를 받았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생활은 설교하고(preaching), 찬양하고(singing), 구걸하는(begging) 것이었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복음적인 가난의 삶을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를 통해 13세기 교회와 수도원 개혁운동에 동력을 제공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아시시 귀족의 딸인 클라라(Clara,1194-1253)를 제자로 받아들여 여성들을 위한 수도회 클라라회를 설립하도록 도왔으며, 팔레스타인 방문을 위해 술탄을 설득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로 시작되는 평화를 위한 기도를 썼고, 모든 자연을 형제자매라 부르며 자연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경건한 심정으로 담아낸 태양의 찬가라는 시를 작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프란체스코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다가 1224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입으신 오상(五傷, 양손과 양발과 옆구리의 상처)의 흔적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처럼 프란체스코의 명성에 힘입어 수도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보나벤투라(Bonaventura) ,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윌리엄 오컴(WiIliam Ockham) 등도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들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 상황은 달라졌다. 프란체스코를 흠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유산을 남기면서 수도회가 부유해지자, 프란체스코가 남긴 가난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는 엄수파와 상황이 변했으니 재산의 소유권은 아니더라도 사용권은 가져야 한다는 온건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엄수파중 일부는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da Fiore, 1132?-1202)의 가르침을 수용하면서 성령파로 불리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면 수도회의 재산 소유를 부인하는 작은 형제회재산 소유를 인정하는 콘벤투알회철저한 청빈과 엄격한 생활을 강조한 카푸친회등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도미니쿠스 수도회 (설교자들의 수도회)

프란체스코와 동시대인으로서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 바로 스페인 출신의 도미니쿠스(Dominiαs, 1170-1221) 이다.

일찍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인 단테(Dante)는 프란체스코를 사랑으로 세상을 타오르게 한 열정으로 묘사하고, 도미니쿠스를 세상에 빛을 가득 채운 광명으로 묘사하였다. 프란체스코가 학문이 겸손을 와해시킬까 두려워한 반면 도미니쿠스는 학문의 탐구를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만 이단을 반박하고 정통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가 온유하고 겸손한 것으로 유명했다면, 도미니쿠스는 냉철하고 근엄하다는 평을 들었다.

도미니쿠스회는 121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정식 인가를 받은 뒤 급속히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중세교회와 수도원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설교, 교훈, 교육 그리고 신학 탐구에 열중하여 특별히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수도회가 되었다. 중세의 대표적인 스콜라 신학자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신비주의 신학자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타울러(Johannes Tauler) 등이 바로 도미니쿠스 수도회 출신들이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에는 기존의 수도회들과 구별되는 몇가지 특정이 있다. 절대 청빈의 표현으로 탁발(구걸)을 표방했다는 점,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기보다는 세상 안으로 뛰어들었다는 점, 평신도 형제회라는 점,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다는 점, 교황청에 직속되었다는 점이다. 교황청에 직속됨으로써 얻는 이익도 있었지만, 수도회가 정치화되거나 종교재판소의 수족이 되어 수구세력의 방패막이로 변질되는 폐단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때문에 15세기 초반의 위대한 교사였던 장 제르송은 교회를 박해하는 네 장본인으로 독재자, 이단, 적그리스도, 탁발수도회를 언급하기까지 하였다.

 

수도원 운동의 명암

수도원 운동은 4세기 초에 시작되어 종교개혁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세교회를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이 남긴 족적은 교회사 전반에 너무나 깊이 각인되어 있기에, 교회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수도원에 무관심할 수 없을 것이다. 수도원은 제도권 교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면서 어두운 현실을 밝히는 등불이었고, 교회사에 큰 영향을 남긴 위대한 성인과 학자들과 선교사들을 배출한 학교였으며, 가난한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구빈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이 역사를 통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만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수도원은 종종 개인적 영웅주의에 기초한 극단적 금욕주의라는 함정에 빠지기도 하였다. 누가 더 오래 금식했는지, 누가 더 극심한 고행을 견뎌냈는지 하는 영웅담이 횡행했다. 시리아의 기둥위의 성자시메온(Symeon)은 높이가 10m를 넘고 직경은 겨우 90cm밖에 되지 않는 기둥 위에서 36년 동안 살았다고 하고, 소시메온(Symeon the younger)은 무려 68년을 기둥 위에서 지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일절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하다가 치아에서 벌레가 기어 나왔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은 멧돼지의 기죽도 뚫는다는 아프리카 모기가 우글거리는 습지에서 오랜 세월 맨몸으로 고행하였고 그러다 모기에 너무 많이 물려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되자 목소리로 겨우 그 사람인지를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도덕적 영웅주의는 영적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기껏해야 자기 의를 자랑하도록 만들 뿐이며 복음이 가르쳐 준 구원의 도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더욱이 후대로 갈수록 수도원은 미신과 무지와 방탕의 산실로 변해버렸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수도원이 초창기에 끼친 유익이 후기의 해악과 저울질할 때 과연 남는 것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후기에 그들은 게으름과 오만과 무지의 대명사였다라고 평가하였다. 수도원 제도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였다.

 

영성 르네상스

수도원운동은 단지 고대와 중세교회의 유산만은 아니다. 개신교 종교 개혁자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인 동시에 베르나르 예찬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수도원 운동이 종교개혁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의 학생이자 수도원 제도의 자녀였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16세기에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를 통해 카르멜 수도회 (Cannelite)의 개혁이 일어나고,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cio of Loyola, 1491-1556)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Jesuits)의 활동에 힘입어 수도 전통을 새롭게 정비하고 발전시키는 움직임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영성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영성과 경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신비주의 사상이나 수도원운동이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때에 수도원운동의 공과(功過)를 잘 구별하여 긍정적인 것들은 잘 발전시켜 나가면서 역사에 나타났던 부정적인 함정에는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성속(聖俗)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적인 영성 이해보다는 기도와 생활, 관상과 실천을 통합시킬 수 있는 통전적 영성을 형성해 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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