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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제6장. 교황 제도의 흥망성쇠 운영자 2018-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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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중세교회 이야기

 

6. 교황 제도의 흥망성쇠 18.8.17()

역사에서 시대 구분의 문제

교회사에서 중세시대가 언제부터 인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정치적인 면을 중시하는 사람은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장 중요하게 꼽을 것

종교적인 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590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l세의 등장에 주목할 것.

그레고리우스 1세야말로 중세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특징들을 교회에 부여한 인물이기 때문

혹자는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끝난 787년을 혹은 샤를마뉴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은 800년을 혹은 로마가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분리된 1054년을 중세의 기점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레고리우스 1세가 교황으로 동장한 590년부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에 이르기까지 1,000년의 시간을 중세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이것도 설명의 편의를 위한 임시적인 시대 구분이다.

 

교황제도, 중세를 떠받치는 기둥

중세시대를 관통하면서 통일성과 지속성을 제공한 두 조직체 교황 제도(6)와 수도원 제도(7)

기원

본래 교황’(pope)이라는 단어는 아버지’ (father)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존경받는 모든 감독을 가리키는 용어.

서방에서 이 칭호가 로마 감독에게만 독점적으로 쓰인 것은 11세기의 일이지만, 동방에서는 이 칭호를 로마 감독의 전유물로 여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교황이라는 칭호가 초대 로마 감독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로마 감독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

교황은 로마의 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전체 교회의 최고 주교 , 바티칸 시국(市國)의 원수(元首) 동으로 표현되어 왔다.

발전

과연 로마 주교만이 베드로의 유일한 계승자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의 주교들과 베드로의 계승자라는 명예를 나누어 갖는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초대교회에서는 로마와 더불어 안티오케이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이 서로 우위를 주장하였다.

1)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가 순교한 도시인 로마의 주교만이 베드로의 계승자이며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에 대해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였고,

2) 다른 도시들의 주교들은 로마 주교에게 명예로 상석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그에게 모든 지역의 교회에 대한 독점적인 권위를 허용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8)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

1) 로마에서는 반석이 곧 베드로니 베드로의 계승자인 로마 주교의 권위 위에 교회가 서야한다고 주장했고,

2) 어떤 사람들은 반석은 베드로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을 의미한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반석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3) 아우구스티누스도 초기에는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하였다가, 후에는 그리스도로 간주하였다.

그러다가 로마의 주교에게 교황으로서의 힘이 실리게 된 것은 그레고리우스 1세가 등극하면서부터 이다.

 

그레고리우스 1(Gregorius, 재위 590-604)

그레고리우스 1세는 종종 초대교회의 마지막 교부(敎父)이자 중세교회 최초의 교황이라 불리는 유능한 인물

그는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수사가 되어 지극히 검소한 생활과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교황으로 즉위한 뒤에도 수도사와 같은 생활을 계속하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들의 종' (Servus Servcrum Dei)으로 자처하며 문란해진 교회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그는 성직매매를 근절, 성직을 받은 후의 결혼을 금지, 성직자의 생활을 위한 규범을 확립하는 등 개혁적 조처들을 단행

전례에도 관심을 가져 그레고리우스 성가를 편찬

그레고리우스 성가는 라틴어 가사를 무반주로 남성이 부르는 가톨릭의 예배음악으로서 교회의 미사와 수도원의 성무일과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수도사였던 아우구스티누스(유명한 신학자와는 다른 사람)를 잉글랜드로 보내 앵글족과 색슨족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선교의 문을 열기도 하였다.

신학자로서 그레고리우스는 연옥의 교리를 공식화하였으며, 베네틱투스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많은 저술을 남김

그레고리우스 1세는 서방교회에서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에 이어 교회 박사로 인정받았으며, ‘전례의 아버지’ ‘수도원의 아버지최후의 교부라는 영예로운 칭호도 얻게 된다.

로마 교회는 그에게 ’()라는 칭호를 수여하여 그레고리우스 대제 (Gregorius the Great)라고 불렀다.

박스만(R.Baxmann)의 표현처럼 , “그레고리우스는 이전 시대의 라틴교회가 교회 정치와 교의, 목회와 예배에 관하여 쌓아놓은 것을 집대성하여 다음 시대를 위해서 어지간해서는 빗나가지 않는 규범들을 세워놓았다

 

그레고리우스 7(재위 1073-1085)

그레고리우스 7세는 토스카나 출생으로 본명은 힐데브란트(Hildebrand)이다.

그는 로마의 수도원에서 성직 교육을 받았고, 교황 레오 9세 하에서 교황 특사로 일하는 등 많은 교황들의 배후에서 오랫동안 교황청의 실세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1073년에 마침내 직접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이루고자 노력한 두가지 일은 교황의 절대적 지위를 확립하는 일과 교회의 도덕 개혁이었다.

교황의 절대적 지위 확립

그레고리우스 7세는 무엇보다 교황의 통치권과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실추된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는 교황청을 중앙 집권화, 모든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 교권(敎權)이 속권(俗權)보다 우월하다고 천명.

이제 교황은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비록 동방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를 보살피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지상의 모든 군주보다 우위에 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만 책임을 질 뿐 사람에 의해서도 간섭받지 않는 존재.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이르러서 비로소 교황절대주의가 살과 피를 얻게 된 것이다.

교황청은 한 목자 아래 한 양떼라는 구호 아래 온 세계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목자는 당연히 교황을 말한다.

교황은 자신의 권위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미치기를 원했다.

교황권 강화 노력은 불가피하게 왕권과 충돌 - 유명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충돌

문제의 핵심은 성직자 임명권을 누가 가지느냐

당시에는 왕이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주교들과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새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는 국왕이 성직 임명을 하는 관습은 성직매매를 낳아 교회를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성직 임명권은 국왕이 아니라 교황에게 속해야 한다고 선언

이에 반대하여 하인리히는 1076124일에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는 법령을 선포하였고, 한 달 뒤에 교황은 하인리히를 파문하는 교서를 공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 베드로의 권위와 힘에 의하여 그리고 교회의 안전과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나는 국왕 하인리히를 금령 아래 두노니 그가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을 금지하노라. 나는 또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거나 맹세하고자 하는 일체의 서약들을 무효화시킨다. 그리하여 그가 국왕으로서 복종받는 것을 금한다

당시 민심은 교황의 편이었고 결국 하얀리히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난히도 추웠던 10771월 눈이 덮인 카노사의 성 앞에 맨발로 무릎을 꿇고 교황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용서를 빌었다.

중세교회 역사를 통해 누가 더 높은지를 다투던 국왕과 교황의 줄다리기가 교황의 한판승으로 결판이 난 것이다. 역사는 이를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부른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밖으로 교황권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안으로 교회의 도덕 개혁을 위한 고삐를 바짝 죄었다. 그는 성직매매와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성직자들의 성적 부패를 일소하고 독신을 강요하였다.

그는 돈으로 성직을 사들인 사제들을 면직시켰고,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고, 결혼한 사제들에게는 아내를 내보내거나 미사 집례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미 결혼한 사제들의 반발이 예상보다 거세지자 그레고리우스는 평신도들에게 결혼한 사제들의 미사에 참석하지 말도록 명령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을 교회사에서는 그레고리우스 개혁 (Gregorian Reforr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세시대에 일어난 중요하고도 광범위한 교회 개혁운동이었다.

교황의 강력한 정책에 밀린 나머지 성직자들의 독신제도가 수립되긴 했지만 은밀한 축첩과 방탕이 결혼생활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런 은밀한 부패와 타락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서 16세기에 이르면 결국 종교개혁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됨

 

인노켄티우스 3(Innocentius 재위 1198-1216) ᅟᅮᆫ

켄티우스 3세의 재위 기간은 중세 교황제도의 절정기이자 황금기에 해당.

바우어(Baur)의 말처럼 인노켄티우스 3세와 더불어 교황제는 절정에 올랐으며, 교황제도의 긴 역사에서 다른 어떤 시기도 그렇게 장구한 평화와 그렇게 영화롭고 찬란한 권력을 누린 적이 없다.”

공헌

그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같은 탁발 수도회를 승인하였으며,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4차 십자군 원정과 중세의 알비파 이단을 진압하기 위한 십자군을 이끌었으며, 이단을 심문하기 위한 종교재판소를 세웠다.

인노켄티우스는 교황을 태양에 , 군주를 달에 비유하였다.

마치 태양이 낮을 주관하듯이 교황은 영혼들을 다스리는 반면에, 군주는 달이 밤을 주관하듯이 인간의 육체를 다스린다.

그리고 달이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고, 규모와 밝기에 있어서 태양에 미치지 못하듯이, 군주의 권세는 보다 본질적인 교황의 권세로부터 위엄과 광채를 얻어 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노켄티우스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황의 칭호에다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칭호를 덧붙였다.

인노켄티우스의 업적 중에서 중요한 것은 제4차 라테란공의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 공의회에서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신앙을 공포했고, 모든 가톨릭 교인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받고 부활절에는 성찬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 십자군에 참여하는 자와 자금을 기부하는 자에게 완전 면죄를 약속함으로써 제4차 십자군원정이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이단들을 진압하기 위한 종교재판소의 설치를 승낙하였다.

그는 교회 생활을 위한 교회법을 수집하고 편찬하여 출판했으며 , 독일의 왕권 문제와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 문제를 조정하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고, 탁발수도회들을 승인함으로써 교회 내에 개혁적인 기운을 불어넣기도 하였다.

인노켄티우스는 중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한사람으로서, 자부심 강한 사제요, 유능한 군주요, 예리한 정치가요, 냉철한 법률가였다.

해악

그가 주도한 제4차 십자군원정은 성지 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상실한 채 , 동방의 그리스도교 도시들을 파괴하고 콘스탄티노플제국을 전복시켜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에 아직까지도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원한을 남기는 참극을 초래하였다.

알비파 이단을 정벌한다는 이유로 단행된 프랑스 남부 도시들에 대한 십자군원정은 비록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되기는 했지만 30년에 걸쳐 수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이었다.

이단적 부패에 대한 심문을 표방하며 종교재판을 주창한 것은 아마도 유럽 문명사에서 가장 불행한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고문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정당한 방법으로 간주되었으며, 살아 있는 이단을 죽이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죽은 자들까지도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화형에 처하는 일이 자행되었다.

종교재판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라지고 무자비한 학살만 남게 되었다.

1216년 인노켄티우스 3세는 성지 해방을 위한 새로운 십자군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자주 앓던 열병으로 갑자기 죽음으로써, 교회사에 명암을 남긴 채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보니파키우스 8(Bonifacius 재위 1294-1303)

중세시대 교황권이 세속 권세보다 위에 있음을 명시한 마지막 문서는 보니파키우스 8세가 1302년에 반포한 우남 상탐 (Unam Sanctam, 하나의 거룩한이라는 뜻)이라는 교서이다.

이 교서는 하나의 거룩한 가톨릭적이며 사도적인 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 밖에는 구원도 없고 죄의 용서도 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영적인 생명이 육적인 생명보다, 정신이 몸보다 고귀한 것처럼 영적인 권력은 명예나 위엄에 있어 지상의 세속적인 권력보다 귀하고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상의 권력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날 때에는 영적인 권력에 의해 제지되고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영적인 권력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다고 말한다.

교서의 제일 마지막에는 우리는 또한 모든 인간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체의 교리는 로마 교황의 권위 아래 있음을 선언하고, 비준하고, 정의하는 바이다"라고 천명한다.

보니파키우스에게서 점점 강해지고 있는 유럽의 민족주의 정서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교적 정서 위에서 교황의 권한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법적이며 사상적인 무장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니파키우스는 중세시대의 어느 교황도 감히 요구해보지 못한 절대적 교황권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유럽 세계에서 진행되는 정치적 현실과는 동떨어진 주장이었다.

보니파키우스는 허구적인 교황권 이론들을 내세우면서 새 시대의 정신을 억눌러보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교황의 절대적 지배권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라 소망에 불과한 것이었다.

보니파키우스를 정점으로하여 교황권은 급속도로 세속의 권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에 의해 1303년 보니파키우스 8세가 이단 혐의로 고발당한 채 쫓겨나 사망하고, 1305년에 프랑스인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자 교황청은 필리프 4세의 뜻에 따라 아비뇽으로 옮겨졌다,

당대인들은 보니파키우스의 재위를 그는 여우처럼 와서 사자처럼 다스리다가 개처럼 죽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아비뇽 교황시대

클레멘스 5세가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에 거주하기 시작한 후 교황들은 계속해서 로마가 아니라 아비농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그레고리우스 11(재위 1370-1378)1377년 로마로 돌아오기까지 약 70년 동안 교황청이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는 소위 아비뇽 교황시대가 이어진다. 이 시기 동안에 7명의 교황이 재위했는데, 모두가 프랑스인이었다.

교황청이 프랑스의 일개 기관이 될 지경에 이르고, 아비뇽 교황청이 탐욕과 매수와 방탕의 복마전으로 손가락질 받게 되면서 교황에 대한 존경심은 뿌리째 흔들렸다

아비뇽은 모든 악의 등나구, 모든 범죄의 소굴, 서방의 바빌로니아, 고통의 샘, 진노의 처소, 오류의 학교, 거짓의 신전, 두려운 감옥, 지상의 지욱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레고리우스 11세에 와서야 교황청은 로마로 복귀하게 된다.

오랫동안 로마를 떠나 있던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오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더 머뭇거릴 경우 이탈리아 내의 영토를 영구히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지만, 시에나의 카테리나(Caterina)와 같은 사람들의 열렬한 설득과 노력도 한몫 하였다.

카테리나는 신비적인 영적 체험과 가난한 자와 병자를 향한 헌신으로 인해 성녀로 추앙을 받았으며,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박사라는 칭호를 얻은 중세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이다.

여성으로서 교회박사라는 명예를 받은 사람은 1970년 선포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와 시에나의 카테리나 그리고 1997년 선포된 리지외의 테레즈(Therese of Lisieux) 3명 뿐이다.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왔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378년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죽자 뒤를 이어 우르바누스 6세가 교황이 되었으나, 아비뇽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또 다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하였다. 동시에 2명의 교황이 생긴 것이다.

로마 계열과 아비뇽 계열의 분열로 인해 나중에 교회 공의회에서는 양측의 교황을 모두 폐하고 제 3의 인물을 교황으로 선출하였지만 양측이 모두 사임을 거부함으로써 교황이 모두 3명이나 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교회에 대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교황의 권위라는 것은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두된 것이 공의회 우위설이다. 이것은 교황 개인의 결정보다도 모든 주교의 회의인 공의회의 결정이 보다 우위에 있다는 이론으로서, 교황권이 약화되고 실추된 역사적인 위기 상황에서 나온 가톨릭교회의 이론적 산물이다.

교황제도는 지금까지도 계속하여 이어져오고 있지만, 중세시대의 막강한 권력으로서의 교황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스림인가, 섬김인가

수도원제도와 더불어 중세교회를 지탱하던 기둥인 교황제도는 중세 전체를 통해 흥망성쇠를 경험하였다.

교황의 권력은 카노사의 굴욕사건에서 보듯이 황제를 발아래 굴복시킬 정도로 강력하기도 하였고, ‘아비뇽 유수사건에서 보듯이 일국의 왕의 시녀 노릇을 할 만큼 초라하기도 하였다.

교황의 권력이 강했던 때라고 하여 반드시 교회가 교회다운 시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박해받던 초대교회가 교회다움을 더 잘 유지하고 있지 않았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권위는 모든 사람을 다스릴 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길 때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다.

교회정치는 꼭 필요하다. 그러나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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