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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제5장. 아우구스티누스 – 모든 신학적 통찰의 원천 운영자 201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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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우구스티누스 모든 신학적 통찰의 원천 18.8.10()

 

교회 역사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Whitehead)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

다니엘 윌리엄스(Daniel Williams) “그리스도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

가톨릭과 개신교 양 진영 모두에서 존경받는 인물

히포공의회(393)와 카르타고공의회 (397)에서 성서가 현재의 형태로 확정되도록 영향력을 행사

교회의 기초가 되는 신학적 저술들- 안셀무스나 아퀴나스(Thomas Aquinas) 중세 신학자들의 아버지

수도원 공동체의 삶을 살아 베르나르(Bernard)나 보나벤투라(Bonaventura)와 같은 신비주의 사상가들의 아버지

루터 (Luther)와 칼빈(Jean Calvin)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선구자

누구도 그만큼 중세 가톨릭교회의 체계에 유익을 끼치면서 동시에 복음적인 종교개혁을 예비하지는 못하였다

리처드 니버 아우구스티누스는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옹호한 고전적 사상가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참고문헌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기록한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회심과 세례의 경험 그리고 고향인 북아프리카로 돌아오는 도중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까지 (354-387)를 기록한 자서전적인 기록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포시디우스(Possidius) 감독이 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회심하고 세례를 받은날부터 죽는 날까지의 나머지 생애 (387-430)를 집중적으로 다룬 기록

출생

3541113일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타가스테(Tagaste, 오늘날의 알제리 수카아라스)에서 이교도인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dus)와 그리스도교도인 어머니 모니카(Monica) 사이에서 출생

카르타고 유학

타가스테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뒤, 12세에 고향에서 남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마다우라에서 수학, 16세에 로마니아누스(Romanianus)라는 독지가의 도움으로 대도시 카르타고(Carthago)로 유학을 가서 수사학을 공부

카르타고에서 한 여자를 만나 동거를 시작하였고 18살이 되던 372년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를 낳음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욕에 빠진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기초한 마니교에 깊이 빠져 이후 9년간이나 이 종파에 몸담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수사학공부에 몰두하여 동료들 중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공부를 마치고 375년 고향인 타가스테에서 1년쯤 수사학을 가르치다가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가 수사학 교사로 일했다.

26살이 되던 380년 자신의 처녀작인 아름다움과 적절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저술,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함

밀라노에서

383년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서 1년쯤 머물다가 384년에는 밀라노로 가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밀라노에서 그는 자신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암브로시우스(Ambrosius) 감독을 만나게 된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와 신앙적 확신은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 안토니오스의 전기, 바울의 서신서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를 회심시키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32살이 되던 386년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회심을 경험한다. 하나님 앞에서 실존적인 질문으로 고뇌하던 그는 들고 읽으라!"(Tolle Lege!)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에 따라 성서를 들고 읽는데,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로마서 13:13-14의 말씀과 만나게 된다.

이제 옛사람의 일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게 된 것이다.

마침내 아우구스티누스는 33살이 되던 387년 부활절에 암브로시우스에게서 세례받음

"눈물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다"는 말을 믿고 수십 년을 하루같이 간구해온 모니카의 기도가 응답

고향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명예와 성공을 쫓던 욕망에서 벗어났기에 더 이상 밀라노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수도원을 세우고 공동생활을 하려는 마음을 먹고 고향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모니카를 잃게 된다. 모니카는 세례를 받는 광경을 자랑스럽게 지켜보고 그 해 가을에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는 내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나를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우셨습니까?”-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를 잃은 뒤 로마로 가서 잠시 머물다가 388년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가 수도원을 설립

이때 그는 이들 아데오다투스를 잃는 슬픔을 또 다시 겪게 된다.

히포의 감독으로

391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원의 일 때문에 고향에서 멀지 않은 히포(Hippo, 오늘날의 알제리 안나바)를 방문

여기서 그는 당시 히포의 감독이던 발레리우스(Valerius)의 강권에 의해 사제 안수를 받고, 395년에는 히포의 감독으로 성별을 받는다. 그리하여 4308287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 동안 사역한다.

저술

그의 신학은 현실의 여러 문제들과 맞닥뜨리면서 체계를 잡아갔다. 그는 일생 동안 여러 차례의 논쟁을 겪었는데, 마니교, 도나투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 그리고 이교도들의 도전에 응전하면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간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고백록,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도성을 비롯한 수많은 책을 저술함으로써 교회사에서 위대한 공헌

 

마니교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신론과 창조론을 확립하다

마니교

페르시아의 마니(Mani, 216-277) 에 의해 창시된 혼합주의적인 종교

그리스도교로부터는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불교로부터는 금욕적인 승려들의 질서를, 그리고 페르시아 종교로부터는 선과 악의 이원론을 채용

마니교도들은 물질계를 창조한 악한 신과 영혼을 창조한 선한 신이 있다고 믿었고 역사는 어둠과 빛의 투쟁이라고 생각

인간의 운명이 별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천문학과 점성술에 많은 관심

마니교를 신봉했던 배경

흔란을 겪고 있던 젊은 시절, 진리에 대한 사랑과 대중의 인기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순결에 대한 열망과 육체적 정욕의 끌림 사이에서 좌절하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선과 악의 적대적인 긴장 원리를 말히는 마니교의 가르침은 매력적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하고 부정적인 정욕에 대해서, 별이나 육체를 탓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9년 동안이나 마니교의 청중(hearers) 집단에 몸을 담았다.

마니교에서 벗어나다

하지만 천문학과 점성술의 모순을 발견하고, 당시 유명한 마니교 지도자였던 파우스투스(Faustus)와의 토론에서 실망하면서부터 그는 마니교의 공허한 찌꺼기들에서 점차 벗어났다

더욱이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와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가 결국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마니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도 파우스투스 논박, 마니 교도들에 반대하여 창세기를 논함』, 『참종교론』, 『악과 자유의지론등을 비롯한 다수의 책들을 통해 자신이 몸담았던 마니교의 허구를 비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학을 확립하였다.

그는 물질은 악하기 때문에 피조세계 역시 악한 것으로 간주한 마니교의 주장을 반박하고 피조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된 선한 것이라고 밝혔으며, 그들의 숙명적인 이원론을 배격하고 영적인 세계와 물적인 세계 모두를 주장하시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해 가르쳤다.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교회론과 성례론을 확립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완전한 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로서의 교회 개념을 비판하면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는 공통체로서의 교회를 옹호하였다. 가라지를 마지막 추수 때까지 뽑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교회 안에서 온전하지 옷한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끌어안고 교회의 통일성을 지켜나가야 할 당위성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의 효력은 그것을 집례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자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성례 그 자체에서 발휘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올바른 교회론과 성례론을 정립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나투스주의에 대해 반박하여 쓴 책들로는 도나투스파에 반대한 세례론, 도나투스파에 반대하여 가톨릭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또는 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 도나투스파에 대한 견책등 다수가 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죄론과 은총론을 확립하다

도나투스주의는 북아프리카에 국한된 운동이었기 때문에 국지적인 것이었지만펠라기우스주의는 전체 그리스도교계에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보편적인 위협이었다.

영국 태생의 펠라기우스(Pelagius)는 인간이 아담의 원죄를 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따라서 인간은 선도 악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은혜는 본래 인간 흔자의 힘으로 이룰 수도 있는 것을 좀 더 쉽게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은총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펠라기우스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에서 배 서리(pear stealing) 사건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자신이 배를 서리한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이 아니라 도둑질을 오락으로 즐겼기 때문이다. 그는 죄 자체의 달콤함에 빠져 있었으며, 죄악 자체를 저지르는 데에서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배 서리 사건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단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이야기이며,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라는 환상을 깨고,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원죄에 물들어 있는지를 고백록에서 절절하게 보여준다. 이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은혜 뿐이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를 돕는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너무도 깊이 죄에 빠져서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마저도 없어지는 것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 안에는 우리를 구원할 만한 이무런 힘이 없다고 확신하였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리석음으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과분한 선물이며 우리는 그 선물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하여 남긴 책으로는 죄의 벌과 용서 및 유아세례에 관하여』, 『영과 문자, 인간의 본성과 은혜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원죄에 관하여』, 『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하여』,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를 비판함등이 있다.

 

이교도들과의 논쟁을 통해 종말론과 국가론을 확립하다

특별히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저술한 하나님의 도성은 변증가로서의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410824일에 서(西) 고트족의 알라리크(ALaric)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로마를 약탈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자 이교도들은 로마가 고대의 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답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책이 바로 하나님의 도성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13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하여 13년이 지난 426년에야 전체 22권으로 완성하였다.

1장부터 14장까지는 로마의 멸망 이유가 기독교에 있지 않다는 변증에 집중하고, 로마가 기독교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15장 이후의 내용들은 대체로 두 도성 사이를 오가며 비교하고 분석합니다. 세상의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며, 세상의 도성 속에 하나님의 도성이 영적으로 일부분 참여하고 있으나 일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가 유지되고 통치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며,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 형태를 가진다. 어거스틴은 영원한 도성이라 불리던 로마의 멸망으로 인해 역사가 무엇인지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세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을 구분함으로 세상과 하나님의 나를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세상은 궁극적으로 소멸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함을 보여 준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멸망 이유가 기독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책을 썼지만, 방대한 분량이 말해주는 것처럼 창조와 역사, 타락과 자유 의지 등의 다양한 화제를 가져온다. 그러나 결국에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처럼 사단이 지배하는 이 땅의 나라는 소멸될 것이나 진리가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이 책은 루터의 두 왕국 사상에 직접적인 영감을 제공하였으며, 교회와 국가의 관계나 종말론에 있어서 교과서와도 같은 역할을 해 왔다.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못하나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대표적인 저술 고백록은 그가 감독이 된 뒤에 쓴 자서전적인 기록으로 그의 책들 가운데서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책이다 이 책은 토마스 아캠피스(Thomas à Kempis)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존 번연(John Bunyan)천로역정과 견줄 만한 인기를 누려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고백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성도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였다. 그가 로마의 관료였던 다리우스(Darius) 에게 고백록과 함께 보낸 편지에서 내 과거의 생활에서 좋게 생각한 면이 있으면 나를 찬양하지 말고 내가 찬양하고 싶은 하나님을 나와 함께 찬양하자"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과거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참회록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려는 찬미록이기도 하다. 마니교도와 도나투스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이던 와중에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 자기를 성찰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또한 고백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박해보다는 특권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위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nominal Christians)이 넘쳐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 것은 철저한 참회와 결단이었다. 이런 필요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저술하게 된 것이다.

고백록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책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못하나이다" 인간은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욕정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품안에서만 안식을 누릴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임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r고백록이다.

 

은총의 박사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를 논쟁만 일삼던 신학자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무엇보다도 히포의 목회자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직 하나님과 영혼에 관심을 가진 목자였다. 그의 독백의 한 구절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 나는 하나님과 영흔에 대해 알고싶다.

이성: 더 이상 알고 싶은 것은 없는가?

아우구스티누스: 절대로 없다.

그는 391년 히포의 사제가 된 이후로 4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40년을 히포의 감독으로서 설교하였으며, 교리문답과 교육에 관여하였고, 수도원생활을 하면서 수도원을 돌보았으며, 많은 사람들을 심방하고 위로하였고, 수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교환하였으며, 신학적인 책들만 아니라 실천적이며 금욕적인 글들을 통해 교인들을 양육하였다.

그는 절제, 금식의 유익, 믿음과 노동, 선한 과부의 삶, 거룩한 처녀성, 결혼생활의 축복퉁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룬 수 많은 책을 저술하기도 한 목회자였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가보면 이미 그가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서 고심한 끝에 써놓은 교훈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새삼 놀라게 된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특별히 은총의 박사라고 부른다. 그가 남긴 유산 중 은총론이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종교개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의 승리라고 말한 바 있다. 중세 로마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에 입각하여 위계질서와 의식체계를 발전시켰다면종교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재발견함으로써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구원을 주창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은총의 박사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은 참으로 정당하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보여준 것처럼 오직 은혜를 주장한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대도 오늘날처럼 분열과 흔란의 시기였다. 그 혼란의 중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관점으로 자신이 만난 문제들을 극복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분열된 영혼 내에서 또는 분열된 그리스도교 교회들 사이에서 또는 다툼으로 분열된 우리 사회 내에서 그리스도교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도 모든 신학적 통찰과 영감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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