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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제4장. 콘스탄티누스는 13번째 사도였는가 운영자 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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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콘스탄티누스는 13번째 사도였는가 18.8.3()

교회사의 인물 가운데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만큼 그 평가가 극명하게 나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한편으로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께서 교회 외적 문제를 감독하도록 임명하신 주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황제’ ‘감독들 중의 감독심지어 “13번째 사도로 까지 칭송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를 흔합시킨 장본인’ ‘교회의 타락을 초래한 원흉’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그리스도교를 이용한 황제로 매도 당하고 있다.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출생

시대적 배경

당시 로마는 한 사람이 다스리기에는 너무나 광활한 영토였기 때문에 크게 동과 서로 나누고 각각의 지역을 정제(正帝Augustus)와 부제(副帝, Caesar) 두 사람이 통치하였다.

따라서 로마 전체를 통틀어 모두 4명의 황제가 있었다. 이 시기를 사두(四頭)정치체제 시기라고 부른다.

가정

아마도 그는 육군 장교인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Flavius Constantius)와 그의 아내 헬레나(Helena) 사이에서 272년부터 288년 사이의 어느 해에 태어났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서로마의 정제인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밑에서 부제가 되었고이때 막시미아누스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이흔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의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부제는 갈레리우스였다.)의 궁정으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황제가 되기까지

이후 로마의 정치권력은 매우 불안정하였고, 4명의 황제 사이에 반목과 권력 다툼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콘스탄티우스는 서로마의 정제가 되었다가 곧 황제의 자리에서 축출된 뒤에, 아들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지역 원정에 나섰다.

콘스탄티우스가 에보라콤(지금의 잉글랜드 요크)에서 306년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 의해 후임 황제로 옹립되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5ec80001.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01pixel, 세로 368pixel 그 후 312년 서로마의 정제였던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물리침으로써 서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라바룸(Labarum)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승리를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5ec87c5f.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92pixel, 세로 28pixel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하기 전날 밤에 꿈에서 이것으로 정복하리라"는 음성과 함께 XP를 겹쳐 쓴 문장을 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 의 처음 두 문자였다 이것을 라바룸이라고 부르는데 니중에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되었다.

잠에서 깨어난 콘스탄티누스는 즉시 병사들에게 모든 방패에 이 문양을 새길 것을 명령하였고, 결과적으로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하였다.

3년 뒤에 세운 콘스탄티누스 동상은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이 구원의 상징 덕분에 저는 당신의 도시를 폭군에게서 구했고, 원로원과 로마 국민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었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기적적인 승리로 인해 이제 십자가는 압제와 모욕의 상징이 아니라 승리와 명예의 기장(旗章)이 되었다.

 

밀라노칙령(313)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무찌르고 숱한 정치적 현안과 통치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메디올라눔(지금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동로마의 유일한 황제인 리키니우스(Licinius)를 만났다. 이 회담에서 타협의 산물로 얻은 성과가 이른바 밀라노칙령이다.

밀라노 칙령

이 칙령의 골자는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관용을 확대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시절에 몰수한 사유 및 공유 재산을 모두 되돌려준다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와 성직자의 재정적·법률적 특권을 보장하고, 로마 시민이 마땅히 져야하는 세금 및 부역의 면제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모욕하는 다양한 관습과 법령을 폐지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그리스도인 노예들의 해방을 촉진했고, 교회에 유산을 기증하는 행위를 합법화했으며, 일요일을 국정 공휴일로 공포하였다.

그는 313년에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교 성직자는 신에게 최고의 봉사를 자유롭게 바칠 수 있을 때 국가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그들이 종교적 의무에 전념하는 것을 세속 관리들이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밀라노칙령을 통해 마침내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에 가해졌던 기나긴 박해가 종식된 것이다.

동서의 유일한 황제로

로마제국의 서방과 동방에 2명의 황제만 남게 되었지만, 그들의 동맹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결국 두 황제의 세력은 서로 충돌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친 뒤에, 콘스탄티누스는 324년 아드리아노플(지금의 터키 에디르네)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위스퀴다르)에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도나투스 논쟁

콘스탄티누스의 기대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로마제국을 지탱하는 새로운 기둥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였다

또한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합시켜주는 아교 역할을 해줄 것을 소망하였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을 유지시키고 통합시키기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그리스도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지, 진실한 신앙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장려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콘스탄티누스의 최대 관심은 교회가 평화로운 가운데 제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덕적인 버팀목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분란

로마제국의 속주인 북아프리카에서 도니투스(Donatus) 논쟁이 불거지면서 그리스도교 내에 큰 분란이 발생하였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이 이전의 박해 시에 변절한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교회 내에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로마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자, 이 문제를 콘스탄티누스에게 호소하였다.

313년부터 320년대 초까지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에 관해 쓴 일련의 문서를 보면 그는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가장 걱정한 점은 교회가 분열되면 로마제국도 분열될 것이고, 결국 그리스도교 신이 로마제국과 콘스탄티누스 자신에게 정벌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평화와 화해를 최우선 과제로 심았으며, 진정한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황제의 지위를 바람직하게 이용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아리우스논쟁

도나투스 논쟁보다 더 심각하게 교회를 분열시킨 것은 아리우스(Areios, 아레이오스)논쟁이었다.

아리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 유사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오스

이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스(Athanasios)는 아들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나신(begotten)분이며, 시간 이전의 영원부터 계신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은 유사한 본질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니케아 공의회 (325)

하나님과 예수가 동일본질(homoousios)이냐, 유사본질 (homoiousios)이냐가 쟁점이었다.

단지 이오타(i) 하나 차이 때문에 전체 교회가 분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가 로마제국을 한데 묶어주는 아교의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하던 황제에게 교회의 분열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문제 때문에 교회가 양분되는 상황을 콘스탄티누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나투스 논쟁과 아리우스 논쟁을 다룸에 있어서 콘스탄티누스의 일차적 관심은 교회의 평화와 제국의 안정과 통일이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제국 내의 주교들을 니케아로 불러들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고,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니케아공의회가 325619일 황궁에서 개최되었다.

니케아공의회에서 그리스도는 낳아진것이지 창조된 것이 아니며"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본질로 되어 있다"고 선포한 니케아 신경이 발표되었다.

일단 아타나시오스가 승리한 듯이 보였지만, 이후에도 두 진영의 논쟁과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건설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 비잔티움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곳에 위치한 비잔티움(Byzantium) 에 새로운 로마 (Nova Roma)를 건설.

로마는 명목상으로는 제국의 수도였지만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쇠퇴하여 이제 제국의 중심 역할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30년 마침내 그는 비잔티움을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공포하였다.

337년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개명되었고, 이곳이 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Istanbul)이다.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최초의 그리스도교 도시로서 이후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 도시의 옛 이름이 비잔티움이었으므로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이라고 불리며, 그 문화는 비잔틴문화라고 불린다.

이 천도로 인해 로마는 더욱 약화되었고 결국 야만족들에게 점령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새로운 수도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공공건물을 신축했으며, 그리스 신전에서 약탈해온 예술품들로 치장하였다.

 

과연 그리스도인이었는가

양면성

콘스탄티누스가 정말 그리스도인이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교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이 선포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도 기존의 모든 이교가 누리던 자유를 동일하게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한 종교혼합주의 정신의 표현일 뿐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분명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교회의 성직자를 후원하고, 예배당을 건축하는 등 친()그리스도교적인 정책들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제국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교적 관습대로 점쟁이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였으며 죽는 순간까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이교의 최고 사제)라는 칭호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할 때에도 그는 순교자들의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하는 동시에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에게 가호를 빌었다.

그가 발행한 여러 주화에는 한쪽 면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다른 쪽 면에는 태양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어쩌면 콘스탄티누스는 옛 신앙과 새 신앙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두 시대와 두 종교의 과도기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잔인성

콘스탄티누스가 정말 그리스도인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은 그의 잔인성에서 기인한다.

그는 로마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324년에 정적이자 처남인 리키니우스를 처형했고, 후환을 없애고자 조카들마저도 죽였다.

326년에는 아들인 크리스푸스(Crispus)를 아내 파우스타(Fausta)와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고문 끝에 처형했다. 크리스푸스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지만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다. 후에 파우스타도 목욕을 하다가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살해하였다.

크리스푸스-파우스타 사건의 실제 내막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정적이나 자기 권좌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가리지않고 제거하는 잔인성을 보인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된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성지순례를 떠난 것이나 예루살렘과 베들레햄에 예배당을 세운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황실에서 일어난 비극을 속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세례

만일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그는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그가 죽기 바로 직전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병으로 몸져눕게 되었고 이때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그가 죽기 직전에야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세례를 가능한 한 뒤로 미루려고 했으며 죽기 전에 세례를 받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교회가 세례는 원죄(原罪)와 더불어 자신이 지은 이전의 모든 자범죄까지 씻어준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능한 한 마지막에 세례를 받고자 했다.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평가

콘스탄티누스는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모든 부분에서 중요한 업적을 이루어낸 탁월한 황제였다.

과히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the Great)라고 칭할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기독교 역사에 공헌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 보자면 그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로마 황제였으며,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여 로마제국의 종교로 만들었고(392년 데오도시우스1세 기독교 국교로 인정)

예수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성묘교회를 짓는등 수많은 예배당을 건축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여 시행

도나투스논쟁이나 아리우스 논쟁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했으며, 325년 니케아공의회를 통해 교회 전체 회의를 소집하여 주도

33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여 비잔틴 문명을 일구어냈다.

이런 수많은 공로 때문에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를 어머니 헬레나와 함께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누스로 부르며 521일을 축일로 정하여 공경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521일을 축일로 정하고 성인으로 공경한다.

당시의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교회사라는 책에서 콘스탄티누스야말로 박해받던 교회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인물이라고 극찬하였으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였다.

유세비우스의 눈에는 콘스탄티누스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줄 13번째 사도로 보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권력자와 국가를 적극 옹호하고 지지하는 소위 어용신학’ (official theology)이 시작되었다.

비판적인 시각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국가와 교회가 결합됨으로써 교회가 본래적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타락하였으며, 국가에 종속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한다.

교회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면서 특권과 특혜를 누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름뿐인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이 양산되었고 가난과 십자가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밀라노칙령이 오히려 교회를 망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니케아공의회는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고 간섭하려는 매우 나쁜 선례를 남긴 시초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르베투스와 같은 인물은 니케아공의회가 열린 325년을 교회 타락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전개된 국가교회 (state church)의 고리를 끊고 자유교회(free church)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다시 숙고하도록 만든다.

평가

교회사의 시기를 구분할 때,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시기를 콘스탄티누스 시대 (Constantinus Period)라고 부를 정도로 교회 역사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크다.

또한 신학사에서는 니케아 이전과 니케아 이후로 시기 구분을 할 만큼 교리의 발전에 있어서 니케아공의회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는 귀 기울일만하다

그는 최초로 신앙을 옹호한 황제이자, 최초로 서방과 동방교회 전체를 후원한 황제였으며, 최초로 성지에 예배당들을 세웠고, 이교도이자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정통 신자이자 이단이었고, 자유분방한 동시에 열광적이었던 인물로서, 모방이나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기억하고 깊이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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