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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제3장 거룩한 신념이냐, 형제 사랑이냐 운영자 2018-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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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거룩한 신념이냐, 형제 사랑이냐              18.7.27()

 

키프리아누스 vs 노바티아누스

배경

여덟 번째 박해 - 249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 데키우스는 로마가 옛 신들을 저버려 옛 영광을 잃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국 전역에 옛 로마의 신들을 숭배할 것을 명하고, 그 신들을 숭배한 사람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옛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든지, 뇌물로 증명서를 구입하든지, 순교의 각오로 신앙을 지키든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초대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혹한 칼의 박해에 대항하여 십자가의 순교 정신으로 맞섰지만, 더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에 굴복하여 신앙을 저버렸다.

데키우스의 박해는 2년만에 끝났지만 초대교회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데키우스의 박해 때에 신앙을 버린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교회에 큰 내분이 생긴 것이다.

상반된 주장

카르타고의 감독이던 키프리아누스(Cyprianus) - 비록 변절한 사람일지라도 회개를 하면 관용을 베풀어 교회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자 하였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한 것이다.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엄격하였다. 그는 용서하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순수성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배교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과

이로 인해 교회 안에 큰 분란이 일어났다. 노바티아누스 지지자들은 교황 코르넬리우스(Come!ius)가 키프리아누스를 옹호하자 이에 맞서 251년 노바티아누스를 대립교황(Antipope)으로 선출하기까지 하였다. 박해 시에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을 둘러싼 이런 갈등과 대립은 얼마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 다시금 재연되었다.

 

고백자들 vs 배반자들

배경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305)는 재위 말기에 정치 불안이 가중되자 전통적인 로마 종교의 부흥에 힘쓰면서 황제숭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였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303년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단행하였다.

교회를 파괴하고, 고위 성직자를 추방하고, 성서를 몰수하는 칙령을 반포한 것이다. 성서를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준 자들은 살아남았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순교와 고난을 당하였다. 이 당시 평신도들은 거의 성서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성서 몰수와 관련해서는 성직자들이 특히 많은 고초를 겪었다.

데키우스의 박해가 끝난 뒤에는 변절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교회에 내분이 일어나더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가 끝난 뒤에는 로마 칙령에 따라 성서를 넘겨준 성직자들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상반된 주장

배교자들에게 엄격한 권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들과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하는 온건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박해의 시기에 고난을 견디고 신앙을 지켜낸 고백자들’(confessors)은 성서를 넘겨준 배반자들’(traditores)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 와중에 카이킬리아누스(Caecilianus)312년 카르타고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출되었는데, 고백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카이킬리아누스에게 안수한 3명의 감독 중 한 사람인 펠릭스(Felix)가 배반자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강경파인 고백자들은 배교한 성직자가 행한 안수는 효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카이킬리아누스 대신에 마요리누스(Majorinus)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출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도나투스(Donatus)를 감독으로 세웠다. 이리하여 이들은 도나투스주의자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도나투스주의는 초대교회에 큰 논쟁과 분열을 불러 일으켰다.

 

인효론 vs 사효론

배경

과연 배교한 감독이 행하는 안수와 성례가 효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신학적 논란이 일어났다.

상반된 주장

인효론(人效論) -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성사(聖事)의 유효성이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의 자격과 가치에 달려있기 때문에 배반자들이 행한 성례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성사를 행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효력이 좌우된다는 주장.

사효론(事效論) - 카이킬리야누스 지지자들은 성사의 효력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자격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사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안수나 세례나 성만찬의 효력이 그것을 베푸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면 신자들은 자신이 받은 성사의 유효성에 대해 계속 회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사 그 자체에서 효력이 발생한다는 주장이 사효론이다.

이후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사효론을 지지하면서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인효론을 반박하였다.

하지만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배교자들이 베푼 성례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카이킬리아누스 진영의 목회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도나투스파에 들어올 경우 다시 세례를 주었다.

재세례를 행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행위였지만,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배반자들에게 받은 세례는 참된 세례가 아니기 때문에 무효이고, 따라서 자신들이 베푸는 세례는 재세례가 아니라 처음 세례라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소위 재세례파 논쟁에서 다시 불거진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성사(聖事)의 유효성을 의심하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재세례 논쟁까지 불러일으키면서 초대교회 성직의 권위를 총체적으로 뒤흔들었다.

그들이 교회란 거룩한 믿음을 끝까지 고수한 알곡들의 모임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반면, 가톨릭교회는 박해로 인해 발생한 이픔을 치유하고 교회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용서와 사랑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도나투스파 vs 가톨릭파

특별히 아프리카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도나투스주의자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세력을 확장시켜 갈 수 있었던 데에는 교회의 순수성에 대한 열망 이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사회, 경제적 차이가 신학적 차이보다 더 중요한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지역적이고 사회적인 배경

강경파 고백자들인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주로 누미디아(Numidia)와 모리타니아(Mauretania) 지역에 기반

농경지대로 아프리카의 토착 전통을 유지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

온건파 배반자들인 카이킬리아누스 지지자들은 카르타고(Carthage) 주변 지역에 뿌리

로마화된 도시로 상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상류계층들이 모여 있는 로마 총독령

경과

도나투스파 교회는 하층 농민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민족주의 정서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화된 카르타고의 상류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카르타고감독 카이킬리아누스에 대해 처음부터 호의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나투스파 교회는 신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차이로 인해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340년대 후반에 일부 도나투스주의자들이 당시 종말론적 사상을 품고 사회 변혁을 추구한 키르쿰켈리온파(Cirumcellions, ‘농촌의 오막살이를 전전하는 자들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에 합세함으로써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키르쿰켈리온파는 그리스도를 위한 전사로 자처하면서 순수한 신앙을 위해 전장에서 죽는 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순교라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극단적으로 치달아 주님을 찬양하라!"고 외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광적인 순교의 열정에 사로잡혀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등 맹목적인 일탈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국가에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대로 소위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도나투스주의자들까지도 공권력의 박해를 받아 처형되거나 추방되는 비운을 겪었다. 도나투스도 이때 갈리아 지방으로 추방되어 355년 즈음에 사망하였다.

도나투스와 가톨릭의 논쟁

도나투스 사후에도 도나투스 추종자들은 계속 가톨릭파와 논쟁을 벌였다

411년 카르타고에서 도나투스파와 가톨릭 측이 모여 사흘에 걸쳐 논쟁을 벌였으나 도나투스파에 불리한 결론이 내려졌다.

이 회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과 관용과 온유를 강조하면서 도나투스주의에 반대하였다.

결국 415년 로마 황제는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사형에 처한다고 공표하였다.

이즈음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당한 전쟁’(Just War)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쟁의 목적이 타당하고, 전쟁이 합법적인 권위에 의해 수행되고, 전쟁이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이루어진다면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썩어가는 팔 하나를 잘라내야 하듯이 교회 전체를 살리기 위해 도나투스파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 또한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428년 반달족이 아프리카를 정복하면서 아프리카 교회는 무너져 내렸고 도나투스 논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7세기에 사라센에 의해 아프리카가 정복되면서 아프리카 교회 전체가 이슬람화되는 비극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도나투스파 논쟁은 교회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직면하게 되는 실존적 갈등을 다룬 논쟁이었다.

거룩함과 순수함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과 용서를 강조할 것인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분리를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일치를 위해 인내하며 절충할 것인가?

국가 권력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와 더불어 하나님의 의를 이룰 것인가?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 혹은 어떤 입장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재세례파

도나투스파 논쟁은 16세기에 와서 재세례파 논쟁으로 재연되었다. 재세례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세례란 스스로의 결단으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성례이고, 교회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며, 교회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아무런 의식도 없이 받은 유아세례는 참된 세례가 아니기 때문에 성인이 된 이후에 자기 스스로의 입으로 신앙을 고백한 다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진정으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의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죄인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입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

루터, 츠빙글리 , 칼뱅과 같은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세례란 인간의 결단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유아세례라 할지라도 참된 세례이며, 따라서 재세례를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오직 거룩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교회는 천국에서나 있을 수 있고, 이 땅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교회 안에는 알곡과 더불어 가라지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니투스주의자들을 반대하면서 이 땅 위의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혼합된 몸(corpus mixtum) 이라고 주장한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국가를 배척하거나 국가로부터 분리될 것이 아니라 둘 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므로 협력적 관계 혹은 적어도 상생적(相生的)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에서도 4세기 도나투스파 논쟁의 메아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사의 신사참배

한국교회사에서도 도나투스파 논쟁을 연상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박해 이후에 일어난 장로교 고려파의 분열이 그것이다.

일제는 식민지 통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 신사참배와 신도(神道) 신앙을 강요하였다.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종교단체들도 일제에 굴복하기 시작해 가톨릭, 성공회,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 등 모든 교단과 교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장로교회도 1938910일 평양에서 제 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물론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당하거나 투옥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거나 심지어는 적극 협력하고 나섰다.

해방이 되자 신사참배 거부로 옥에 갇혔다가 출옥한 성도 20여 명이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한 뒤 1945920한국교회 재건 기본원칙을 발표하고 한국교회 전체의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회개와 참회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교회 지도자들은 미온적인 태도와 자기합리화로 얼버무려 넘어갔다. 장로교는 단지 1947(33회 총회), 1948(34회 총회), 1954(40회 총회) 세 차례에 걸쳐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니 이를 취소한다는 결의를 했을 뿐이다.

이후에 개인적으로는 신사참배에 대해 참회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장로교회 전체 차원에서는 그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다. 2008924일 제93회 총회에서 열린 4개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합통, 합신, 한국기독교장로회) 연합예배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지 70년 만에 공개적으로 그 죄를 회개한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신사참배는 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되는 이유가 되었다. 일제의 억압 하에서 거룩한 신념을 지킨 사람들이 결국 1951년 고려파로 분리해 나가게 되었다. 이는 신사참배가 남긴 지울 수 없는 후유증으로, 그 후 장로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로 (1953),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으로(1959) 나누어지는 등 계속해서 핵분열을 해나갔다.

이후에도 정당성이 없는 사소한 이유들로 인해 분열이 계속 일어나면서 분파주의가 마치 한국 장로교회의 특정이라도 되는듯한 인상을 남김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실추되고 이제는 선교에 거침돌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그리고 거룩한 교회를 지향하며

니케아신경은 하나의 , 거룩한, 보편적 , 사도적교회를 고백한다. 교회는 하나됨을 지켜야하는 동시에 거룩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두 원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다. 노바티아누스 논쟁, 도나투스 논쟁, 재세례파 논쟁, 신사참배 논쟁은 모두 그러한 경우이다.

분명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기 때문에 분열은 정당하지 못하다. 하지만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없는"(5:27) 공동체여야 한다는 원리도 중요하다.

분명 이 땅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교회 안에는 의로운 사람과 죄인이, 즉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성도의 교제”(Communion of Saints)가 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거룩과 하나됨을 위해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고자 무조건 용서와 사랑만을 강조하여 성도들의 삶을 나태하고 해이하게 만드는 것도 능사가 아니며,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고자 지나친 엄격주의를 지향해 분파와 분열을 초래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교회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은혜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성서도 인애(love)와 진리 (truth)가 같이 만나고 의 (righteousness)와 화평 (peace) 이 서로 입 맞춘다:'(85:10)고 하였으며,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speaking the truth in love, 4:15)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하여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곰곰이 생각해볼 때, 교회의 하나됨과 거룩성이야말로 우리의 최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11:45)는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순종했는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주님의 소망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는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는 말씀에 따라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을 쓰고 용을 썼던가?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라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과연 세상이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됨도 지키지 못했고 거룩함도 지키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이 하나의교회를 향한 열정과 거룩한교회를 향한 열심을 회복할 때이다. 그럴 때에 새로운 개혁과 부홍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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