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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제8장 하나님이 원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신다? 운영자 20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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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하나님이 원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신다?  

중세의 십자군전쟁(1096-1291)

성전(聖戰)인가,침략(侵掠)인가

중세의 전성기에 일어난 십자군전쟁은 교회사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암울한 장면 중 하나에 속한다. 십자군전쟁은 당시 이슬람 세력 아래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서방의 교황이 주창하고 왕들과 기사들과 민중들이 열렬히 호응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10961차 십자군 원정으로 시작해 1291년 서방이 점령하고 있던 아크레가 함락되기까지 근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이 십자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들이 옷과 깃발에 십자가를 새겨넣고 출정하였기 때문이다. 서방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십자가를 앞세운 성전(聖戰)이겠지만,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프랑크인들의 침략이요 약탈행위였다. 이슬람교인들이 이 전쟁을 프랑크인들의 침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십자군에 참여한 주력군이 프랑스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십자군전쟁은 왜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무슨 결과를 남겼는가? 그리고 우리는 십자군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하는 것일까?

 

십자군 전쟁의 동기

십자군전쟁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동기

1095년 동방 황제였던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교황 우르바누스(Urbanus)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였다. 당시 알렉시우스는 이슬람 세력에게 예루살렘과 안티오케이아(안디옥)와 에데사를 빼앗기고 자신의 권좌마저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서방으로 부터 얼마간 군사적인 원조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서방은 소규모의 지원군을 파병한 것이 아니라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수중에서 되찾을 목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십자군을 파병하였다. 아마도 알렉시우스 자신도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의 군대에 적잖게 놀랐을 것이다.

배후의 동기 - 첫째, 교황은 십자군 파병을 통해 동방교회를 서방교회에 흡수하고자 하는 욕심.

일찍부터 라틴어를 사용하던 서방 교회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동방교회는 언어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의식적, 교리적 차이들로 인해 갈등을 빚다가 1054년 공식적으로 결별을 맞은 터였다.

교황 우르바누스는 이번 기회에 대규모의 십자군을 동방에 보내어 서방의 위력을 과시하고 로마교회의 우위를 보여줌으로써 동방교회를 서방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온 세계에 흘어져 있는 전체 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분명하게 천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둘째, 사람들의 시선을 밖으로 돌려 당시 서유럽에 팽배하던 반목과 갈등을 잠재우고 내부적인 평화를 모색하려는 의도

당시 서유럽은 중세 봉건 영주들과 기사들 사이에 전쟁이 지나치게 빈발하는 상황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거나 특정한 축일에는 전투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소위 신의 평화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때에 십자군전쟁은 내부의 전쟁 열기를 외부로 방출시킬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교의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십자군 출병은 당시 봉건적인 장자상속법으로 인해 장남에게만 부친의 영지가 상속되어 불만에 차 있던 차남 이하 아들들의 눈을 동방으로 돌리게 해주었고 그들에게 그것은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여기에 십자군에 참여하면 죄를 사면해주고, 부채를 탕감해주고, 세금을 면제해주는 등 여러 혜택을 베푼다고 교황청이 발표하자 기사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평민들까지 동방으로 떠나는 십자군에 자원하게 되었다.

셋째,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이라는 목표가 십자군의 핵심적인 동기였다

당시 서유럽에는 성지순례가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가 남아 있는 예루살렘 순례는 순례자들에게 영적인 복락뿐 아니라 현실적인 행복까지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겨져 일생의 목표와 같은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세상의 중심에 위치한 거룩한 하나님의 도시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서 순례자들을 박해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 서방의 민심을 술렁이게 했다.

이 소문은 다분히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순례자들로 인한 경제적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이슬람이 순례자들을 박해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고 설사 박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십자군을 파병하려는 교황의 입장에서 이 박해의 소문은 너무나 유용한 전쟁의 명분거리였고, 거기에 살과 피를 붙여서 더욱 증폭시킬 필요가 있었다.

넷째,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동기가 십자군 파병을 부채질하였다.

일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 운동으로 8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한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세 그리스도교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벌인 전투)의 연속선상에서 십자군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동방의 비단과 종이와 향료를 가져다가 장사하여 한 밑천 잡으려는 장사치들과, 팔레스타인과 콘스탄티노플에 보존되어 있는 성유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각자의 관심 때문에 십자군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십자군 전쟁의 전개

1095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 전쟁을 호소하는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다. 교황은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군병들입니다 가슴이나 어깨에 피 묻은 십자가를 착용하십시오. 다시는 취소할 수 없는 서약의 증표로, 하나님의 도움이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는다는 표지로 그것을 착용하십시오

1차 십자군(1096-1099)

본대에 앞서 수많은 농민들과 군중들로 구성된 군중 십자군이 먼저 출발, 지도자는 프랑스 아미앵 출신의 은자 피에르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방향을 몰라 무작정 동쪽으로 가다가 독일의 마인츠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것이 서유럽에서의 반()유대주의의 효시.

이들 군중십자군은 베오그라드를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다가 결국 니케아 부근의 제리고르돈 요새에서 전멸당함

하지만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과 같은 유명한 기사들이 이끄는 본대가 뒤이어 와서 작은 승리에 도취해 있던 니케아와 안티오케이아를 공략하여 점령 - 안티오케이아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찔렀던 병사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하게 되면서 십자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10997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데 성공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동방에 서방의 식민지가 세워지게 됨, 이것은 서유럽 식민주의 역사에 첫 장

예루살렘에 세워진 라틴 왕국의 최초 수장은 부용의 고드프루아(Godefroy) - 왕이라는 칭호 대신 성묘의 수호자

1년후 그가죽고 동생인 보두앵이 1100년 성탄절에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에서 새로운 왕으로 즉위

그 후 예루살렘의 라틴왕국은 1187102일 살라딘에게 점령될 때까지 87년 동안 존속

1차 십자군은 성지 탈환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였지만,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으로 인해 빛을 잃음. 당시 예루살렘 성전 지역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가 사람들의 무릎까지, 말의 고삐까지 차올랐다고 전해짐.

2차 십자군 (1147-1148)

십자군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에데사, 안티오케이아, 트리폴리스에도 식민 국가를 건설하였는데 1144년 이슬람에 의해 에데사 백작령이 무너지자 제 2차 십자군이 출정

이때 십자군 원정을 독려한 사람이 시토 수도회의 지도자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베르나르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임

내부의 반목으로 인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이슬람군에게 패배

베르나르 - 십자군과 그리스도교 세계에 만연한 죄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라고 평가

3차 십자군 (1189-1192)

1187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에 의해 예루살렘을 빼앗기게 되자, 성지 재탈환을 위해 출정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 독일의 붉은수염왕 프리드라히 1세를 중심으로 지중해 항로출정

원정 도중 프리드리히는 사고로 익사, 필리프 2세는 1191년 아크레를 탈환하고 귀국, 3차 십자군은 리처드의 십자군.

리처드는 어차피 예루살렘을 점령해봤자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길 것이라고 판단, 살라딘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고, 이로써 예루살렘 재탈환 작전은 실패 - 영화 킹텀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의 배경

4차 십자군(1202-1204) - ‘방향전환 십자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서 동방의 중심이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거기에 라틴제국을 건설

베네치아인의 상업지상주의에 이끌려 같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나라인 헝가리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1204412일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의 무자비한 약탈에 희생, 성 소피아 성당의 보물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물들이 서유럽으로 옮겨짐.

이렇게 해서 세워진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제국은 1261년 비잔틴제국의 반격으로 멸망될 때까지 57년간 지속.

이 사건으로 인해 동방과 서방교회의 골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으며(2001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그리고 약탈 행위에 대해 동방교회에 정식으로 사과), 그 와중에서 많은 힘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던 비잔틴제국은 결국 1453년 이슬람 세력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만다

서유럽과 이슬람 제국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해주던 비잔틴제국이 멸망하자 두 세력은 이제 직접적으로 충돌

5차 십자군 (1217-1221)

5차 십자군(1217-1221)도 성지 예루살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본부격인 이집트를 공격 방향전환 십자군

이 십자군은 헝가리, 독일,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예루살렘의 라틴왕국이 협력, 이집트 북부 도시 다미에타를 점령

이집트는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조건으로 십자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십자군은 지원 파병을 약속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를 믿고 이 조건을 거부.

결국 십자군은 이슬람 군대의 반격과 나일 강의 홍수 때문에 다미에타마저 빼앗기고 패퇴하고 말았고, 지원군 파병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 파문을 당함

6차 십자군(1228-1229)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프라드리히 2세가 뒤늦게 이집트 원정에 나선 것으로, 공식 십자군으로 간주하지 않기도 함

당시 이집트의 술탄 알 카밀은 내란으로 골치 상황에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술책에 휘말려 평화조약을 체결

이로써 프리드리히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넘겨받고 1229년 예루살렘에 무혈 입성- 성지 회복 목적달성

하지만 파문당한 황제와 현지 제후의 대립과 불화가 표면화되어 왕국은 무정부상태의 혼란에 빠지게 되고, 결국 1244년 예루살렘은 15년 만에 다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만다

7차 십자군(1248-1254)과 제8차 십자군(1270)

() 루이로 알려진 프랑스 루이 9세의 신앙심에서 비롯. 루이는 수도사의 경건과 기사도를 겸비한 인물로 그리스도교 군주의 전형과 같은 인물. 십자군전쟁과 관련이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베르나르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성인의 반열

루이 9세는 예루살렘의 열쇠는 카이로에 있다"는 전략 개념 아래 이집트와 튀니스(튀니지의 수도)를 향해 진격했으나 1250년에 포로로 잡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서야 겨우 석방되었고, 1270년 원정에서는 튀니스에서 병사

이후 십자군이 점령한 안티오케이아, 트리폴리아를 이슬람에게 차례로 내어주게 되었고, 1291년 팔레스타인에 남은 예루살렘 왕국의 마지막 거점이던 아크레마저 함락당함으로써 사실상 십자군전쟁은 막을 내렸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와 평가

십자군이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기간은 제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점령기(1099-1187)와 제6차 십자군원정으로 인한 점령기(1229-1244)뿐이었다.

거의 200년 동안 지속된 십자군전쟁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에 엄청난 영향

첫째, 서유럽인들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당시 자신들의 세계 안에만 갇혀 있던 서유럽인들은 십자군 참전을 통해 비잔틴과 이슬람 문화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학문과 문학 등 정신사 전반에 걸쳐 자극을 받아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게 됨.

1차 십자군의 성공은 서유럽인들에게 자신감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

둘째, 숭고한 공동의 대의를 위해 신앙심을 발휘하는 경험

십자군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숭고한 공동의 대의를 위해 신앙심을 발휘하는 경험 - 비록 그 대의가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얼마간 조작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셋째, 정치 경제적인 유익

십자군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새로운 무역 활동의 무대를 제공함으로써 서유럽에 번영을 가져다 주었고,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가 싹틀 수 있는 여건을 마련

그러나 이러한 효과들은 모두 서유럽인의 입장에서 볼 때만 의미가 있으며, 그나마 십자군 원래의 목적이 아니라 모두가 부수적으로 일어난 현상일 뿐이다.

이에 반해 십자군전쟁의 부정적인 폐해는 훨씬 심각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십자군은 교황권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 십자군이 일어날 때 교황권의 성장에 힘입은 바 컸는데, 이제 이 십자군이 퇴락하고 약화되자 교황권도 덩달아 쇠퇴하게 되었다. 결국 교황의 권위가 십자군의 흥망에 좌우되는 형국이 된 것

둘째, 십자군이 급속히 발전시킨 면죄부 제도가 교회에 올무가 되었다.

교황은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부모에게까지 죄의 사면을 약속하고 또한 물질로 십자군을 후원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면죄를 약속하는 등 사면권을 남발.

1209년 인노켄티우스 3세 때에는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을 정벌하기 위해 떠나는 십자군에게도 면죄를 약속하였고, 1300년에는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주재한 희년 행사의 일환으로 로마를 순례하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대사면 허용

이와 같은 면죄의 남발로 인해 이후 로마 가톨릭은 종교개혁자들의 공격을 자초하게 됨

셋째, 십자군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적대감을 고조시켜 이슬람 근본주의가 성장하는 데 한몫 하였다.

두 세계 사이에 지금껏 지속되고 있는 적대적 긴장관계는 바로 십자군 전쟁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넷째, 십자군은 서유럽 식민주의 역사의 첫 출발인 동시에 유대인 박해의 시작이었다.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세운 라틴제국은 유럽의 제국주의적인 식민지 개척의 신호탄과도 같았으며,

십자군이 저지른 유대인 박해의 망령은 이후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

십자군전쟁은 당시 지배층의 정치적 욕심, 기사계급의 물질적 욕구, 순진한 민중들의 종교적 열망 등이 한데 뒤섞여 만들어낸 거대한 집단적 욕망의 분출이었다..

십자군에 반대의 목소리

마치 온 세상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십자군에 열광하던 그 당시에도 십자군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있었다

요아킴은 교황들이 업적을 쌓기 위한 구실로 십자군을 이용한다고 비판

룰루스(Raymundus Lullus)도 무력 사용에 반대하면서 성지 정복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사용하신 방법으로만 시도해야 한다. 그 방법이란 기도와 눈물이요, 우리 목숨을 드리는 것이다"라고 주장

십자군이 내걸었던 기치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군은 분명 실패하였다.

성지 예루살렘을 결국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슬람의 진격을 항구적으로 저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동방과 서방의 분열을 치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군다나 이 전쟁이 서유럽인, 비잔틴인, 아랍인, 유대인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십자군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인 사랑을 버리고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실패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달콤하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까지 거의 200년에 걸쳐 이루어진 십자가와 초승달의 충돌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종교의 충돌을 넘어서 그리스도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었다.

2001911테러 발생 이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 전쟁을 십자군전쟁에 비유한 것이나 이슬람 무장세력의 미국에 대한 테러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어쩌면 십자군전쟁은 단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라 불리는 에라스무스(Erasmus)는 십자가와 전쟁이라는 단어는 결코 함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거룩한 전쟁이 있을 수 있는가? 도대체 정당한 전쟁이 어떻게 기능하단 말인가? 에라스무스는 전쟁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달콤하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암닭에 비유하셨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매처럼 행동한다. 그리스도는 양을 치는 목자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리처럼 서로를 잡아 찢는다. 당신 형제의 뱃속에 칼을 찔러 넣으면서 어떻게 우리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가? 확실히 우리가 많은 사람을 죽여가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오히려 많은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 무수한 이교도를 지옥으로 보내지 않고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야 하며, 잔인하게 저주와 파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경건한 기도와 마음으로 그들의 안녕을 벌어야 할 것이며, 그들에게 더 올바른 정신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해야만 한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자는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해서 살 수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십자군 전쟁은 교회는 칼로 승리를 거둘 수 없고 다만 사랑과 섬김으로만, 말씀과 기도로만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준다.

이 진리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십자군 전쟁에 휘말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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