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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 저주에서 복으로 운영자 2017-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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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수) 맥체인 성경통독 179일차 & 매일성경 


신명기 33-34장 

이사야 60

시편119편 145-176

마태복음 8장  

 

<매일성경>   

 

  • 저주에서 복으로

    찬송 : 새찬송가 436장 (찬송가 499장)

  • 2017-07-06   [갈라디아서(Galatians) 3:10 - 3:18] 

     

     개역한글 듣기 NIV 영어성경 듣기

  •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믿음은 복으로(9절), 율법의 행위는 저주로 귀결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율법은 그 약속을 폐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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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3,14절 율법은 죄인에게 저주를 선고하지만, 그리스도는 죄인을 저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율법(신명기 21장 23절)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이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그 저주를 무효화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죽음이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죽음입니다. 모세의 법은 아브라함의 복을 유대인에게로 한정했지만, 그리스도는 이방인에게까지 확장하시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십니다. 이 성령으로 하나님은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0~12절 율법의 행위는 구원이 아니라 저주로 이끕니다. 율법은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해줄 뿐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자격을 주지 못합니다. 문제는 할례나 절기 준수 같은 외형적 행위들만으로 율법 전체를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입니다. 율법의 행위들로 공허한 신앙을 감추고 꾸미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가시적 ‘율법의 행위’들이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불순종’이라는 곤경에 대해서는 어떤 해답도 주지 못합니다.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해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11절 거짓 교사들은 율법의 행위들을 수용하는 것이 더 성숙한 믿음의 단계라고 주장하지만, 바울은 이제 율법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새 언약의 삶의 원리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믿음이 아니면 의의 소망에 이를 수도, 주의 형상을 닮을 수도 영생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15~18절 사람의 확정된 유언도 변경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언약도 한 번 정해지면 파기할 수 없습니다. 약속보다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이 하나님이 확정하신 약속을 부정하거나 폐기할 수 없습니다. 이삭(한 자손)을 통해 유업(칭의, 하나님 나라, 의의 소망)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약속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유업의 통로입니다. 

기도
공동체-저주 아래 있던 저희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시니 감사합니다. 

열방-일본에는 기독교인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많은 일본인들이 기독교를 외국 종교로 여기고 있다. 일본에 선교적 돌파구가 마련되어 많은 일본인들이 복음을 듣게 되도록  

 

 

믿음과 행위를 대조한다. 

행위란 작위의 주체가 ‘나’라면
믿음이란 ‘대상’을 전제한다.

그 분을 믿는 것이요
그 분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라.

그 분을 믿기 때문에 하는 나의 순종도 믿음이며
그 분을 믿기 때문에 하는 나의 행위도 믿음이라.

그러면 행위는 무엇일까?
‘나’의 생각을 따라 사는 것이 행위요
‘정해진 법’을 따라 사는 것이 행위이며

그가 무엇이든, 무엇을 했든
내가 무엇을 함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행위이겠다.

우리의 상식도 그렇고
우리의 종교심도 그렇고
‘행위’가 자연스럽다.

어려워서 고상하고
보여서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많은 거짓의 사람들은 이 행위로 사람을 현혹하고 얽매어 왔다. 
그래서 고상해 지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 행위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불가능하여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분을 믿음으로 나의 죽음이 실제가 되며
그 분을 믿음으로 그 분과 그분의 사람들과 나도 하나가 된다.

주님, 내가 주를 믿나이다. (J)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

매일성경 2017년 7월 5일 갈 3:1-9 “믿음과 행위” 

 

***********

 

???? “백작부인”


영국의 재판소에 어떤 백작부인이 
자기를 ‘암퇘지’라고 부른 상인을 데리고 와 
고발했다.  
 
판사가 그 상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자 
상인이 항의하듯 물었다.

“아니, 그러면~
백작부인을 돼지라고 부를 수 없다는 말입니까?”

판사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상인이 말했다.

“그럼 한 가지 여쭤보겠는데요~
돼지를 ‘백작부인’이라고 부를 수는
있습니까?”

“물론~
그렇게 부르는 것은 피고의 자유요.”

그러자 판사의 말을 들은 그 상인이 
백작부인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

 
“안녕하시오? 백작부인~~!!”  

  

 

+++++++++

 

프랑스의 교육자이며 사회사업가, 

목사인 JF오벨랑에게  
 
어느 날 이웃집 부인이 찾아와 고통스러운 
현실을 호소하자 그는 이렇게 위로했다. 
 
“부인, 지금
제 앞에 두 개의 보석이 놓여 있습니다.
이 둘은 색깔이나 투명도, 순수함에 있어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는 눈부신 광채가 있고
다른 것은 흐릿합니다.

그 이유는,
찬란히 빛나는 것은 80번이나 깎였지만
흐릿한 것은 8번 밖에 깎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고통으로 깍이고 깎인 영혼에는
남다른 광채가 있게 마련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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