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22 주보의 글입니다. | 운영자 | 2017-01-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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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민목사의 트위터 잠언록 길을 찾는 사람
가까운 것에 이끌려가고 자주 만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무엇을 가까이 하고 있고 누구를 자주 만나세요?
완벽주의자는..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누군가를 끝없이 벼랑 끝으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에게 드러나기를 바라다가 사람에게 묶이고 사람에게 묶이다가 사람에게 분노하고 사람에게 분노하다가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다 내가 사람 바라보다가 생긴 일입니다.
사람을 무시하면 안 해도 될 싸움을 하게 되고, 사람을 존중하면 하고 있던 다툼도 멈출 수 있습니다.
모든 악순환은… 누군가 대신 손해 보는 사람이 나타나야 끝납니다.
진정한 리더는… 책임의 원인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고, 책임져야 할 사람을 찾는 사람도 아니고, 스스로 남의 책임까지 끌어 안는 사람입니다.
잘난 사람보다 계속 배우는 사람이 낫고, 멀리 간 사람보다 계속 가는 사람이 낫습니다.
무력(無力)과 무력(武力)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한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뭐든지 억지로 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한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정말 억지로 할 수 없을까? 그 좋은 것을 왜 싫어할까... 물가에 끌고가서 억지로 입을 벌려 먹일 수는 있지 않을까?. 일단 억지로라도 한 번 먹어보고 맛을 알면 그 후엔 스스로 찾을테니까.
하지만 그건 고문이다. 무력을 동원하면 안되는 일이 없는 듯 보인다. 강제로 하게하면 일은 될지 모른다.
일은 되겠지만 더욱 중요한 '사람'을 잃어버리게 한다. 억지로 한 일 치고서 좋은 추억을 가지긴 힘들다. 무력을 동원해서 잡은 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순 없다. 강제로 한들 거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무력감을 느낄 때 무력을 동원해 보고싶은 유혹이 있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고 기다려야 한다. 깨닫고 스스로 필요를 느낄 때까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참여할 때까지.
그런데 세월은 흐르고 기회는 사라져간다. 조바심이 나고 그래서 또 다시 push한다. 어느 정도 적당한 압력은 괜찮을까?
우리는 지금 성경통독을 하고 있다. 프로그램이 없어도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면 프로그램에 자신을 매어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경은 읽어야 하겠기에. 그런데 그 마음마저 없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성경을 읽어야할 필요성을 못느낀다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무력이라도 동원하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들어온다. 자꾸 귀찮게 하면 귀찮아서라도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 않나... 목사는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 아닌가...
● 마지막 때
● 미루나무 그림묵상
<나를 망가뜨렸던 거짓말>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속성을 죄인을 향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반드시 당신의 죄를 알고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피 값을 알아야 한다“라는 진지한 사랑을 말해주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식적으로 변한 데는 죄에 대한 잘못된 태도가 가장 큰 요인이다.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직 용서를 하시지 않았음에도 사람이 사람을 용서해준다. 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 것인가. 죄를 지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어야 할 진지한 관계의 회복 없이 누가 용서받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 김길 / 전적의존 -
주일오전 11:00 수요저녁 7:30 금요저녁 7:30 주일학교 주일오전10:30, 화pm4시(한글교실) 담임목사 이기형
419 Northmount Dr. NW Calgary T2K3H7 【Highwood Lutheran Church 별관】 Cp.403)804-8815 Home.403)374-2004 홈피: http://gajok.onmam.com 메일: emoksa@empal.com ☆예배를 위해 차량지원 합니다. ★교회 광고와 예배 순서는 별지로 제공됩니다.
2017.1.22(4권4주) 117th letter
하늘편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께 드립니다.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안하는 것은 아닌지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 19:15)
자신은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청년이 군대에 갔습니다. 훈련소에 입소를 한 날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저녁까지 무조건 외우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로 시작하는 복무신조와 주요 군가 12곡의 가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못 외우는 머리라고 자조하면서 그냥 개겼습니다. 그날 밤 훈련소에서 비명 비슷한 소리가 아련하게 산골짜기에 메아리친 것 같기도 합니다. 다음날 정신이 번쩍 난 그 친구는 하룻만에 종이 한 장을 단숨에 다 외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암기 능력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머리가 이렇게 좋은 줄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만약 이런 암기력으로 중고등학교때 공부를 했다면 서울대도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공부를 못 한 것이 아니고 안 한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안 사는 것은 아닐까요? 그냥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면 지금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도 더 많아지고 감당해야 될 부담도 더 많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못살아.'하고 스스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 한계를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긍휼'을 약속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힘써 노력하고 모든 방법을 찾았으나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실족하게 될 때, 또는 좌절하고 낙심이 될 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가 임하게 됩니다. ⓒ최용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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