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06(주) 빛나게 산다는 것은 (엡 5:8-9) | 이기형 목사 | 2025-04-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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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5:8-9절 개역개정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250406(주일예배) 빛나게 산다는 것은 (엡 5:8-9) 빛나는 세상, 빛나는 사람들 인류는 오랜 기간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을 만들었다. 횃불이나 등잔, 양초, 가스등, 기름램프 같은 것들이다. 에디슨은 전구의 발명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는 해가 지고 나서도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야간 작업이 가능함으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도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도 빛이라 하셨고, 스스로 빛나려는 사람들도 있다. 스타들, 인플루언서, 그리고 뛰어나려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다. 어쩌면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각자는 빛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를 보면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정말 그럴까? 1.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여기 ‘전에는’ 언제를 말하는가? 주 안에 있기 전이다. 주 안에 있지 않을 때는 어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은 빛의 혁명으로 어둠을 몰아내었다. 이제는 24시간을 대낮과 같이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만든 그 빛으로 세상은 더욱 빛나게 되었을까? 그 화려한 불빛 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엇인가?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도 일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어둠의 일은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 호색 다툼과 시기이다. 전구가 어둠의 일을 몰아내지 못한다는 것이고, 오히려 전구의 발명으로 지구 생태계는 몸살을 앓게 되었고, 피조물의 생체 리듬도 깨지면서 심각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자기가 빛나는 별인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정상의 자리에서 떨어지는 스타들도 없지 않다. 성경은 사탄을 아침의 아들 계명성에 비유한다. 그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 찍힌 까닭은 무엇인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자리를 높이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교만이다. 그가 빛나는 별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교만하지 않았을텐데, 그로 인해 스스로 타락한 것이다. 사탄이 몰고 온 어둠으로 인해 온 세상은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빛이라고 떠벌렸던 사람들로 인해 세계 각처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는 이렇게 이어진다.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어쩌면 그것이 자기비하가 아니라 정직한 성찰이다. 시편 22편의 시인 다윗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욥도 달과 별도 하나님 앞에 빛나지 못하는데 하물며 구더기같은 사람 벌레같은 인생이겠는가 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인생은 어둠이고 벌레같은 인생일 수 밖에 없다. 2.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에서는 자기가 벌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음에도 그래도 괜찮다고 노래한다.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정말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아닐거다. 우리의 빛은 우리 스스로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그러니까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빛이다. 내가 노력해서 성공이라는 것을 만들어 빛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부요라는 것을 만들어서 빛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빛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이 나를 통해 드러나도록 나를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삶이다. 믿음은 주 안에 거하는 것이다. 바울이 반복해서 강조함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어떤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상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예배와 기도와 헌금과 봉사... 이런 행위가 주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동행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빛이 되기 위해서 선행과 종교적인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한다. 제아무리 억만금짜리 금으로 만든 전구라해도, 플러그에 꽂혀 있지 않으면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빛을 낼 수가 없다. 예수와 깊이 연결되지 않는 한 우리 삶은 어둠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하늘가족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가 되시는가? 형식적이고 무의미한 대답이 아니라 정말 그런가? 여러분이 주님 안에 있을 때 주님은 여러분에게 빛을 주시고 빛나게 하실 것이다. 3. 빛나게 산다는 것은 이제 에베소서 5:8절의 끝자락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이다. 빛의 자녀를 생각하면 삐까번쩍, 블링블링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빛의 자녀의 삶이 그런 것일까?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을 바울은 3가지로 제시하였다.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 열매맺는 하나님 앞에 삶이 된다는 것이다. 1) 착함 예전에는 ‘참 착하다’가 최고의 칭찬이었고, 착한 어린이가 되는 것이 우리 인격의 목표가 되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착하다는 어리숙하고 순진해서 이용당하고 손해보기 쉬운 바보 같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도 성경은 우리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 하신다. 예수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까닭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까닭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여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신다. 앞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 하셨는데, 우리가 빛을 드러내는 삶을 착한 행실이라 하셨다. 여기 착함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도 포함되겠지만, 유용하고 적절한, 그러니까 목적에 맞는 삶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이 착한 삶이라는 것이다. 2) 의로움 ‘의로움’은 의가 되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맺음이다. 의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처럼 살아가려는 것이다. 세상에는 불의가 판을 친다. 불의는 기준이 없다. 기준이라면 오로지 자기의 이익일 뿐이다. 그런데 의로움은 타협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절대 가치,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빠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바른 길을 걸어간다. 3) 진실함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다. 속임이 가능한 것은 사람은 외모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지보다 사람들 보기에 어떤지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베드로가 권면하는데,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숨은 사람 인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실된 삶, 중심을 보시는 감출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마무리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된 세상에 살아가는 빛의 자녀들에게 선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갈 것을 말씀하신다. 세상에는 부적응자로 살아가라신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 우리끼리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면 아무 문제 없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그들은 여전히 ‘전에는’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전에는 어둠이었다. 어둠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빛나는 별이나 되는 양 살아간다. 어둠속에 있기에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을 다윗은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했고 욥은 구더기같은 사람 벌레같은 인생이라 했다. 이것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정직한 고백인데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한가? 빛이 있어야 비로소 볼 수 있는데, 빛되신 주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자기를 보게 된다. 그래서 빛되신 주 안에 있으면 그 비춰주시는 빛으로 빛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빛되신 주 안에 거하라.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주와 동행하라. 그러면 그를 통해 주님의 빛이 드러날 것이다. 빛나게 살아간다는 것은 삐까번쩍하고 블링블링한 자기과시와 자랑이 아니라,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이다.그렇게 빛의 자녀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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