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2(주) 다비다굼 (행 9:36-42) | 이기형 목사 | 2024-05-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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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9:36-42절 개역개정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240512(주일예배) 다비다굼(행 9:36-42) Mother's day 성경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오늘은 베드로가 살린 도르가에 대해 말씀 나누려고 한다. 1. 다비다의 삶과 죽음 오늘 본문 36절은 다비다의 삶과 죽음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고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여기 제자라 함은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이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포괄적 명칭이었다.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도르가는 헬라어 이름이다. 주후 1세기경 팔레스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상당수가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 자기들이 주로 사용하는 아람어로 된 이름과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헬라어로 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람어 다비다를 헬라어로 바꾸면 도르가인데 다같이 영양(gazelle)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도르가의 삶을 한 줄로 요약하였는데,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 심히 많았다는 단어는 충만하다는 의미인데. 성경에서 충만은 가득찬 상태를 넘어 흘러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반복적이다. 도르가의 삶에서 흘러 넘친 것은 선행과 구제였다. 이것은 자신을 향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삶이었다. 물론, 다비다 역시 자신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국한하지 않고 그 지경을 넓혀 타인을 향한 선행과 구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거기에 감동이 있고 칭찬이 있다. 누가는 제자된 삶의 모습을 선행과 구제로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예배와 기도와 전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러한 삶의 열매가 결국은 선행과 구제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은 선행과 구제마저도 자신의 스팩을 쌓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전락할만큼 철저하게 이기적인 세상이 되어 버렸는데, 우리의 삶의 방향이 자신에게서 타인으로 바뀌어가면 좋겠다. 하나님은 우리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말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성도의 빛된 삶이라 하시고 그 빛된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성도의 착한 행실이다(마 5:16). 이런 사람들이 오래 오래 살아야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는데,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다. 장례를 치를 수 밖에 없다. 2. 다비다의 죽음을 대하는 주변인들 1) 제자들(욥바의 성도들) 성도들은 다비다의 시신을 깨끗이 씻었는데, 다음 절차인 향을 마르지 않고 다락에 누인다. 뭘 하려는 것일까? 다락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장소였고,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장소였다. 또한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곳이며,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오신 곳이다. 더 나아가 성령강림의 장소가 다락이었다. 이렇듯 다락방은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과 성령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던 공간의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비다를 다락방에 안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비다를 안치하고 제자들은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와 달라고 간청한다. 욥바의 성도들은 베드로가 룻다에서 8년동안 중풍으로 고생하던 애니아를 고친 사건을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애니아를 고치셨다면 죽은 다비다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욥바의 성도들은 이런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2) 과부들 다비다의 죽음을 특히 슬퍼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과부들이었다. 앞서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가 흘러 넘쳤다고 했는데, 모든 과부들이 베드로의 곁에서 다비다의 선행을 증거하였다. 이 과부들이 다비다의 증인들이었고, 그들이 보여준 속옷과 겉옷이 증거물이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음 후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누군가 우리를 위해 증언해줄 것이다. 그 때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예수믿고 구원받았다고 증언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저 사람의 도움으로 내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잘 지낼 수 있었다고 증언해주면 좋겠다. 그렇지만 반대의 증언도 있겠다. 우리는 종종 연예인들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폭력적인 과거가 밝혀지면서 몰락하는 것을 보았다. 나의 죽음에 진정으로 애도하고 나의 삶을 진실되게 증언해 주는 그런 증인들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많이 있기를 축복한다. 3) 베드로 자초지종을 다 들은 베드로가 사람들을 다 내보낸다.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다. 욥바의 성도들도, 욥바의 과부들도 한결같이 다비다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 다비다를 향하여 선포하였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아람어로는 “다비다 굼!!” 이 상황을 어디서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셨지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함께 있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 사건의 증인이었고 어떻게 예수께서 죽은 딸을 살리셨는지를 가까이서 배웠던 것이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달리다굼이라고 선포하셨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람어는 달리다쿰이었는데, 베드로가 한 말은 다비다쿰이다. 아람어에서 보면 두 번째 문자에서 알파벳 하나 차이이다.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의 행동이 예수님의 행동에 근거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것은 그가 살린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주 예수께서 하신 일이다. 예수 이름에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는줄 믿는다. 하늘가족 식구들이 그 이름으로 죽은 세상을 살려내는 귀한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마무리 다비다 주변 사람들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남으로 행복했겠지만, 천국을 다녀본 다비다도 좋아했을까? 다비다가 이제 천국에서 안식과 기쁨을 누리려는데, 도로가! 한다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과부들이 있으니까 다비다는 내키지 않은 길을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자리를 찾아갈 수도 있지만,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사명의 사람들이 되시면 좋겠다. 이젠 쉬고 싶고 그만하고 싶어도 떠나고 싶어도 다비다쿰!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실 때, 다시금 나를 필요로 하는 부름의 자리를 지켜갈 수 있으면 좋겠다.지금 나를 향해 선포되는 ***쿰! 그 말씀을 들으시고 일어나서 선행과 구제의 사명을 잘 담당해 나가시는 하늘가족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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