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0(주) 비공식작전이라도(눅 10:30-37) | 이기형 목사 | 2023-08-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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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0:30-37절 개역개정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비공식작전이라도(눅 10:30-37) 지난 화요일에 교회에서 ‘비공식작전’이라는 영화를 단체로 관람했다. 영화 비공식작전은 한국인 최초 피랍 사건인 1986년 1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피랍되었던 외교관 ‘도재승 서기관’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인데, 당시 언론이 보도한 기사에는 도재승 서기관이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납치돼 1년 9개월 만에 돌아왔다는 내용이 전부라고 한다. 당시 정부가 87년 직선제 개헌과 88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이 사건을 거론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기에 납치된 외교관을 구출하는 것은 비공식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훗날 신동아는 제보를 바탕으로 그 구체적인 이야기를 보도한바 있다. 영화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다. 너무 쉽고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살진 쉽지 않다. 설교는 비유에 등장하는 3부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려 한다. 1. 피해자. 어떤 강도만난 사람 어떤 사람, somebody는 특정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누구나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났다.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날거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어느날 갑자기 원치않는 불의한 일을 당하고 죽을 지경에 놓여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누구도 모를리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잊고 산다. 그런 일들은 나의 일상에 잘 일어나지 않을거라 기대하니까. 대한민국 서울같은 법치와 질서가 존중되는 나라도 있지만, 레바논 베이루트처럼 불법과 무질서가 난무한 도시도 있다. 우리 살아가는 똑같은 공간 안에 있다. 강도짓을 할 수 밖에 없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해적질이라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도 있다. 깨지고 망가진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더 많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에도 숨기고 감추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여러분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TV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세상은 아름다운 여행지로 보여준다. 여행 프로그램이 대세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꿈은 돈 벌어서 그런 곳 찾아다니는 여행이다. 그런데 세상이 정말 그런가? 그 아름다움을 만들고 유지하려면 수많은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탄식이 있어야 한다. TV 프로그램 중에 그런 세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다큐멘터리나 탐사 프로이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시는가? 아름답고 즐거움이 가득한 세상인가? 아름다운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억울한 자들의 신음과 호소가 눈에 들어오시는가?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래야 아무도 무시하지 못한다고, 그러면 세상은 아름답다고, 힘을 길러 돈을 벌어 이 아름다운 세상을 즐기라고 그러실건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두 얼굴을 온전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돈을 벌고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순식간에 어떤 사람 somebody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납치된 오서기관은 법적 보호를 받는 대한민국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somebody 인질로 바뀌지 않던가. 미국 최악의 산불이라는 하와이 산불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양심이 있든 없든 모두를 잿더미에 앉게 하지 않던가. 세상에서 잘 살았어도 죽음과 마지막 심판은 그렇게 모든 인류를 절망으로 끌어간다. 비록 사는동안 육체를 무엇으로 치장하고 장식한들 그 영혼은 헐벗고 거의 죽어서 소망이 없다면, 잠시 부귀영화를 누린다해도 아무리 망각한다해도 곧 절망과 고통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기에, 그 진면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2. 방관자. 제사장과 레위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중요한건 보고서.. 그들이 못본건 아니었다. 알고 있었지만 피하여 지나갔다. 여기 등장하는 세 사람 중에 두명은 그런 사람이다. 우리 가운데 셋중 둘은 그럴지 모르겠다. ‘도덕적 인간은 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까?’에 대한 실험이 있다. 1973년 심리학자 존 달리(J. Darley)와 대니얼 베이트슨(D. Bateson)은 프린스턴대학교 신학과 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설교 주제와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돕는 일에 연관성을 알아보려 했다. 결과는 쓰러진 사람을 돕는 비율을 결정했던 변수는 설교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고, 오직 예배 시작 시간까지 몇 분 남았느냐에 따라 달랐다. 도덕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핑계는 도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허락지 않아서라고 합리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럴 마음은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현실이 마땅치 않아서 돕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가? 마음은 있지만 형편이 안되어서 그런다고. 나중에 형편되면 도울거라고 하면서 지금 방관자가 된다. 여기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웃은 사랑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 하나님 사랑을 거짓말이라고 하신다(요일 4:20)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우리도 그렇게 위선자가 될 수 있음을 무서운 경고로 들어야겠다. 3. 구조자. 사마리아 사람 예수님은 구조자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신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상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인 강도 만난 자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민다. 사마리아 사람은 피하여 지나친게 아니라 가까이 다가간다. 가까이가면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가까이 가야만 보인다. 그래서 책상에서 탁상공론이 아니라 가까이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가까이 가보니 이유와 책임을 따지기 전에 당장에 싸매야 하는 상처가 보인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로 응급 조치를 한다. 이 사람은 자기의 가던 길 멈추고 자기 짐승에서 내려 강도 만난 자를 태운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 주막으로 데려가서 더욱 간호를 한다. 시간을 내고 재산을 낸다. 치료를 부탁하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백지수표를 발행한다. 감동이지 않는가?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돈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납치하고 인질을 삼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돈 때문에 경제성과 국가적인 이익을 내세워 그 인질을 외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돈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고 행동한다. 안기부가 협상금의 송금을 거부하자, 외교부 직원들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이들은 자기들의 월급 3개월치를 내놓겠다는 각서를 쓴다. 이 각서가 브로커를 움직여서 한국에서 막힌 250만불을 자기 돈으로 내놓게 한다. 또 하나, 판수은 민준의 돈가방을 털어서 현지인 여자 친구집에 오지만, 여자 친구를 그 돈을 거부한다. 결국 판수는 그 돈을 다시 민준에게 돌려 주면서 둘이 한 팀이 된다. 나 같으면 그럴리 없을거 같은, 전혀 비현실적인 이야기 아닌가? 물론 우리도 돈보다 생명이 귀한 것이라도 동의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긴 쉽지 않다. 세상은 돈보다 생명이 귀하다고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된다. 자기 짐승에 태우고 자기 비용을 들이고, 돌아와서까지 책임지겠다고 희생하는 사람, 그를 통해 구원된다. 그렇게 세상에서는 말도 안되는 주인공들이 되시면 좋겠다. 그가 복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다. 마무리 이제 성경과 영화에서 포커스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으로 옮겨보자. 여러분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행복하고 즐겁고, 열심히 돈벌어서 성공하고 여행 다니는 그런 세상인가? 세상의 그늘만 볼 필요는 없겠지만, 세상의 양면을 정직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에서 신음하고 고통하는 이들의 민낯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을 해도 허무할 수 밖에 없고, 공든 탑을 쌓아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편안과 안락으로 애써 잊고 살아가며 회피하는, 인생의 본질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단 말이다. 가진 자들의 부와 권세가 부럽고 그들이 누리는 행복이 부럽긴한데, 그 무엇으로 치장하든지, 그 무엇을 소유했든지, 잠시 세상에 사는 동안 행복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죽음으로 고통과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실존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여러분은 방관자인가? 구조자인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더 큰 가치인 하나님을 섬기면 사람들은 이웃들은 방관해도 괜찮은걸까?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서 그만큼 누렸으니까 죽어서는 자기 죄로 인해 저주와 형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구원을 받으라고 초대해도 싫다고 뿌리치는데, 어쩔수 없이 내버려둘 수 밖에 없는거 아닌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영혼 구원하는 일에 방관하고 있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용납하실까? 비유의 결론으로 37절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주셨다. 파수꾼은 알려야 한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하셨다. 우리교회 첫 번째 핵심가치가 무엇인가? 찾는이 중심이다. 말은 그렇게 하고 무슨 프로그램도 없고, 전폭적인 지원도 없고, 누구도 나서지 않고,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고 생명에 대한 부담이 있다면 비공식작전이라도 펼쳐야 하지 않을까. 그 열정과 마음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크신 값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도 반대가 있지만 그럼에도 영화에서 비공식작전을 펼치는 동기는 단순하다. "살아 있는데 데려와야 하지 않습니까." 살아날 수 있는데,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 주님께 교회로 데려와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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