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4(주) 질문 있습니까?(합 2:1-2) | 이기형 목사 | 2023-06-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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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하박국2:1-2절 개역개정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2023년 6월 4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230604(주일예배)질문 있습니까?(합 2:1-2)
흔히 사람은 쉽게 안변한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변해야 한다고 고민을 한다. 물리적인 현상에서 input과 output은 비교적 정확하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자연법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input은 있는데 output은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맴돌고 있는 분들이 있다. 뭐가 문제일까? output(열매나 변화)이 없다면 2가지를 살펴봐야 하는데, 외부 요인으로는 input이 잘못되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단적인 말씀을 듣는다면 그 영혼에 치명적인 해를 입을 것이다. 외부적으로 잘못된게 아니라면 내부적으로 내가 말씀을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문화적인 배경에서 신앙생활에 범하기 쉬운 몇가지 오류를 찾아보려 한다. 이런 것들이 교회 안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들어와 우리의 믿음을 변질시키고 있다. Ⅰ. 신앙의 변화를 방해하는 배경들 1. 물량주의, 외모지상주의 내면의 세계보다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인 모습을 중요하게 여긴다. 교회에서 임직자를 선출할 때 기준이 있다. 신앙생활은 몇 년 했는가? 교회 모임과 예배 생활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가? 헌금은 잘 하는가? 보통 교회에서 성경 통독 횟수가 많을수록, 기도의 시간이 길수록, 방언을 하고 금식기도가 많을수록,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영적 권위를 인정받는다. 여러분은 이런 기준이 ‘표준’이라고 동의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몇 번을 읽었느냐가 아니라 왜 성경을 읽느냐가 어떻게 읽었느냐가 중요한게 아닌가. 그럼에도 오늘날 신앙생활을 몇 년 했고, 그 경험과 지식이 말씀을 대체하는 권위와 기준이 되어 버렸다. Why '왜'를 묻지 않으면 How '어떻게'를 찾을 수 없고 그러면 '이대로'가 답이 된다.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는다. 껍데기만 붙들고 있으면 열심히 하지만 변화는 없다. 2. 상명하복의 권위주의 시키는대로, 하라면 하는거지 거기에 무슨 이유를 묻거나 생각을 가지면 반항이나 도전으로 여겼다. 이것은 신앙과 교회 안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질문하는 것을 믿음없는 의심이나 불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좋은 믿음은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맹목적인 믿음을 모범적인 믿음이라 칭찬하였다. 우리가 어떻게 다 이해하겠냐고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치기에 목사가 뭐라 설교해도 무조건반사처럼 아멘이 튀어 나온다. 교회의 반지성주의, 몰상식주의는 대책이 없다. 그러다보니 왜? 라는 질문도, 어떻게? 라는 방법도 사라지고 무조건 순종만 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세뇌이고 그루밍 길들이는 것이지 믿음은 아니다. 3. 결과주의, 성과주의 질문보다 답이 중요하고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그래서 결과가 뭔데, 답이 뭔데? 하라는거야 말라는거야? Yes인지 No인지 그것만 말해. 단순한 흑백 이분법적 사고로 편을 가른다.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문화는 왜? 어떻게?라는 성찰이나 생각이나 질문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의 열매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인가? 교회의 중직을 맡는 것인가? 왜 그 직분을 감당하고, 어떻게 그 직분을 감당하는지가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기초하지 않으면 그 어떤 직분도 모래위에 지은 집이 될 것이다. Ⅱ. 질문은 중요하다. 이러한 문화적인 배경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은 질문이다. 인공지능 챗봇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모든 업무가 쉬어질거라 예측한다. 그런데 아무리 인공지능이라 해도 질문이 없으면 답이 없고, 대답도 질문한대로 대답한다. 질문이 하찮으면 대답도 하찮을 것이다. 흔히 "질문 안에 답이 있다"고들 하는데 과연 그렇다. 잘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인 외젠 이오네스코는 “깨달음을 주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고 말한다. 학문과 인류의 발달은 질문에서 시작했다.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만유인력법칙을 발견하였고, 프로이드는 "무엇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무의식과 정신분석의 세상을 발견한다. Ⅲ. 성경의 질문들 성경에서도 질문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이 답만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질문이 엄청 많으신 분이셨다. <예수께서 물으신 모든 것>의 저자가 예수님의 질문 숫자를 셌는데, 무려 305번의 질문이 있다한다. 성경의 중요한 진리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성경 안에는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이 기록되어 있다. 시편에는 자기의 인생과 역사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을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How long, LORD?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Why LORD “왜 제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 욥기는 시종일관 하나님께 따지듯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향해서 수많은 질문들을 던졌다. 대표적으로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현실을 방치하는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가? 하나님께서 방치하는게 아니라 심판의 도구로 갈대아 사람들을 들어 쓰시겠다고 대답하신다. 선지자 하박국은 다시 질문한다. 어찌하여 악인을 도구로 사용하여 의인을 치게 하시는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질문을 던진 하박국이 그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박국의 질문에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피조물인 주제에 감히 창조주께 질문하냐고, 선지자 하나님의 종이 주인인 하나님이 하는 일에 이유를 묻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대답해 주신다. 악한 갈대아 바벨론 또한 심판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러면서 이신득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신다. 이처럼 중요한 말씀들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졌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질문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면 좋겠다. Ⅳ. 마무리 어느 교회나 말씀 중심이고 성경이 중요한데, 어떤 말씀, 어떤 믿음인가? 저는 하늘가족 식구들이 말씀에 대해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성찰하고 사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소망하면서 그런 교회와 성도되시기를 힘쓰려고 한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가 함께 들은 설교 말씀으로 나눔을 한다. 말씀으로 삶을 살기, 이 나눔은 정말 중요하다. 이 나눔을 통해 내가 받은 말씀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서로에게 도전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면 좋겠다. 또 하나, 새롭게 시작하려는게 있다. 설교의 소통, 곧 설교 Q&A 질문과 대답인데, 그래서 오늘 질문에 대한 중요성을 정황하게 말씀드렸다. 주저하고 있었는데, 지난주 어떤 목사님과 대화를 하는데 그걸 실행하는 교회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저도 해보려고 한다. 설교든지 말씀이든지 설교 시간이든지, 언제든지 말씀을 들으면서 질문할 것이 있으면 제 핸드폰 403-804-8815으로 문자를 보내주시라. 거기에 공개질문인지 개인질문인지 선택해 주시면 공개질문은 예배 시간에, 개인 질문은 개인적으로 따로 답변해 드리려고 한다. 여러분 질문이 있는가? 여러분의 삶에 질문하시고, 성경의 말씀에 질문하시고 설교에 질문하실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혹은 설교자로부터 정직한 대답을 들으실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이 내게 부딪히고 나에게 도전할 때, 그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할 때 우리의 삶에 작은 변화는 시작된다. 그런 하늘가족교회, 그리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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