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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제10장.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운영자 201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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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8.10.26()

개혁교회의 아버지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출생에서 교육까지

츠빙글리(Uhich Zwingli)는 루터 (14831110)보다 7주 정도 늦은 148411일 스위스 장크트갈렌 주에 속한 토겐부르크 지방의 빌트하우스(Wilclhaus)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 루터와 동시대 사람

베센의 사제로 인문주의 학문에 호감을 가진 그의 삼촌 바르톨로뮤로부터 영향 츠빙글리 역시 인문주의 사상에 개방적

베른에서 라틴 문학을 배운후빈과 바젤 대학에서 수학 - 이 당시에 그는 인문학에 심취하여 고전을 열심히 공부.

음악적인 재능을 발전시켜 류트(가장 오래된 현악기, 만돌린) 하프 바이올린 플루트 나팔과 같은 악기들을 수준급으로 연주

츠벙글리는 바젤에서 1504년 학사학위를1506년 석사학위를 취득

 

글라루스와 아인지델른의 사제

츠빙글리는 15069월 콘스탄츠에서 사제로 안수를 받고 고향인 빌트하우스에서 첫 미사를 집전

글라루스에서의 사역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글라루스(Glarus)의 성직자로 청빙을 받아 1516년까지 10년을 목회

츠빙글리를 특정짓는 세 가지 흐름

첫째, 애국주의. 그는 스위스인들이 용병으로 고용되어 당시의 여러 전투에서 희생되는 것에 대해 강하게 저항과 반대

최초의 저작들 <수소의 우화><미로> 와 같은 작품들은 바로 이 용병제도에 대한 반론

둘째, 스콜라주의의 영향. 츠빙글리는 카톨릭의 사제답게 스콜라신학에 정통.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의 저작들에 익숙 - 중세 스콜라신학의 옛길 (via antiqua)에 익숙

루터는 오컴이나 가브리엘 비엘의 사상인 새길(via modema)에 익숙

셋째, 인문주의의 영향. 그는 로마와 그리스의 고전들과 교부들의 저작들을 광범위하게 읽었다.

1515년 혹은 1516인문주의자들의 왕자인 에라스무스를 만나면서 더욱 심화

이교도의 고전을 높이 평가, 교회의 폐해를 비판, 성서 연구에 헌신, 외적인 형식보다 내적인 경건을 강조, 원죄에 대해 온건한 견해, 성만찬에 대해 상징적인 해석- 에라스무스의 영향

이후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의 반()펠라기우스적인 견해에 반대를 표하면서 예정론을 확고하게 주장하기도

글라루스 시기에 츠빙글리는 애국자요 신학자요 인문주의자로서의 모습을 형성하였지만 아직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의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아인지델른에서의 사역 (1516년부터)

아인지델른은 기적을 행사한다는 유명한 검은 동정녀 마리아상이 있는 순례 여행의 중심 도시

이곳에서 츠빙글리는 성서 연구에 매진

츠빙글리는 면죄부 판매에 대해 반대, 성모마리아보다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라고 가르침, 교황제도에 대해서도 성서적인 근거가 빈약하다고 비판 - 일부 역사가들은 츠벙 글리의 종교개혁이 루터보다 이른 1516년에 시작되었다고 간주하기도 한다.

츠빙글리가 가툴릭의 폐해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종교개혁자로서라기보다는 에라스무스주의자 혹은 가톨릭 내의 앞선 진보주의자로서의 비판(1520년 성직록 거부)

 

취리히의 개혁자

츠빙글리는 자신의 35번째 생일인 15191l일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목회자로 부임

취리히 -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도시들 중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 당시 인구 7천명, 스위스 외교의 중심지

츠빙글리는 마태복음에 대한 연속적인 강해설교를 시작 - 모든 말씀을 빠짐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하는 설교의 전통을 새롭게 세움. 이것은 지금까지도 개혁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카톨릭교회나 루터가 교회력에 따라서 미리 주어진 본문만을 선택적으로 설교하던 방식과는 다른 것

15198월과 15202월 사이에 취리히에 흑사병이 돌아 인구의 3분의 1 에 달하는 사람들이 병사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발병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었고 이 경험은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 - 1520년에 교황청의 성직록을 거부하는 결단

사순절 소시지 사건

1522년 사순절에 취리히의 유명한 출판업자 프로샤우어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소시지를 먹는 사건이 발생

중세 가톨릭은 사순절 기간에 육식을 금하는 전통을 지켰는데소시지는 돼지고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먹는 것은 결국 사순절의 육식 금지 전통을 깬다는 의미

로마교회 측에서는 사순절의 금식 규례를 어긴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

츠빙글리는 사순절에 육식을 금하는 것은 성서적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무엇이나 먹을 자유가 있다고 주장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15231월과 10월에 가툴릭과 개혁진영 사이에 공개 논쟁이 벌어졌고, 시의회는 결국 츠빙글리의 손을 들어 주었다.

츠빙글리는 학문적인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일상어인 독일어로 자신의 주장을 67개 조항으료 정리하여 출판

67개 조항은 교회적인 조치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모든 개혁 프로그램을 포괄하고 있어서 츠벙글리의 종교개혁이 전면적이고 포괄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급진주의자들(재세례파)과의 논쟁

1523년 공개 논쟁을 거치면서 개혁진영 안에도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논 사실이 드러났다.

일부 사람들은 츠빙글리 개혁의 내용이 너무 미온적이며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불평

개혁진영은 성상미사세례 성서해석십일조국가 등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다.

보다 확실하고 빠른 개혁을 원하는 급진주의자들

츠빙글리가 성만찬 예복을 거부하지 않고, 십자가 성호를 긋는 행위를 허용하고, 성상에 대해서도 분명한 반대태도를 취하지 않는 등 불확실한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

또한 공개논쟁에서 미사가 성서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로 미사를 폐지하지 않고 정부와 대중들의 눈치를 보면서 미루고 있다고 불만을 표출

결국 1525121일 콘라트 그레벨을 중심으로 한 몇몇 사람들은 펠릭스 만츠의 집에 모여 독자적인 모임 결성

그들은 유아세례가 성서적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재세례를 시행

그레벨이 블라우록에게 최초로 재세례, 블라우록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 ‘재세례파라고 칭함

유아세례를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 문제는 16세기의 중요한 논쟁들 가운데 하나

마침내 취리히 의회가 개입하여 152637일 유아세례를 무시하고 재세례를 행하는 자들은 수장시키겠다고 발표, 152715일 펠릭스 만츠는 리마트 강에 수장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츠빙글리와 재세례파 사이의 의견 차이 유아세례와 교회론, 국가론

츠빙글리는 교회가 거룩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죄인들도 섞여 있는 공동체라고 본 반면에, 재세례파는 교회란 거룩한 성도들만의 모임이어야 한다고 주장 재세례파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성도들의 공동체에서 파문하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

재세례파는 교회문제에 의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왈가왈부히는 것에 대해 저항 그들은 교회와 국가는 서로 분리되어야 하며 국가가 교회문제에 간섭해서도 안되고 교회가 교회개혁을 이루는 일에 국가를 끌어들여서도 안 된다고 주장

그러나 츠빙글리는 교회와 국가가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며, 의회의 대의제를 통한 의결방식을 따르는 것이 교회 개혁을 평화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

유아세례교회국가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로 인해 츠벙글리와 재세례파는 동지에서 적대자로 돌아서고 말았다.

츠빙글리는 당시의 정황에서 기존의 체계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급진적인 방법이나 대결구도를 가지고서는 교회개혁이라는 목표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려가 작용했을 것.

 

교회와 사회의 개혁

츠빙글리는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가톨릭주의자들에게 반대,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적인 재세례파에게 반대하면서 개혁진행

1522년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폐지하고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의회에 청원 - 1522년부터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흔 관계

1525년은 츠빙글리의 개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 부활절에 미사가 성만찬으로 대체된 것

예배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진행. 금이나 은으로 만든 성찬기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소박한 접시와 잔을 사용하고 불필요한 의식들을 제거하고 단순한 예식으로 성만찬을 진행 - 개혁교회 성만찬의 모범

15256예언’(prophezei) 이라 불리는 성서 연구 모임이 시작

일주일에 다섯번 라틴어 · 히브리어 · 그리스어 · 독일어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토론히는 모임

전통에 호소하는 가툴릭의 오류와 성령에 호소하는 급진주의자들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철저한 성서 연구

예언 모임은 후에 칼뱅과 청교도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개혁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취리히 시의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개혁을 위해서도 노력

15211월에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법률과 5월에는 결혼에 관한 법률이 제정

1530년에는 도덕적인 제반 문제에 대한 규율을 제정

이를 위해서 츠빙글리는 시의회와 기꺼이 손을 잡고 사회 전체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다했다.

 

루터와의 성만찬 논쟁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도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었는데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

츠빙글리가 루터보다 더 인문주의 전통에 가깝고 따라서 이성을 긍정적으로 시용했기 때문에 성찬에 대해서도 보다 합리적인 기념설 혹은 상정설의 입장을 취하였다. 반면에 루터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강력하게 주장

루터는 이것이 내 몸이다'(26:26)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성만찬에서의 빵이 곧 예수의 몸이라고 주장, 츠빙글리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63)는 말씀에 의지하여 빵은 상징일 뿐이며 따라서 육체적 임재가 아닌 영적 임재임을 강조

루터주의자들과 츠빙글리주의자들은 헤센의 필립 중재로 1529101-4일 마르부르크에서 모여 의논했지만 결국 합의에 성공하지 못했다.

발표한 14개 조항에 모두 동의했지만 마지막 15번째 조항의 일부분에서 결국 합의를 보지 못했다. 15번째 조항은

비록 우리가 현재로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빵과 포도주 안에 육체적으로 임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합의할 수 없지만, 양측은 서로에 대해 양심이 허용하는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또한 양측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올바른 깨달음에 이르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해야만 한다"

이 회담의 실패는 종교개혁 진영에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가 분열하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결국 츠빙글리와 루터는 서로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고, 얼마 후(1531) 츠빙글리가 카펠전쟁에서 사망함으로써 둘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었다.

 

츠빙글리의 죽음

츠빙글리 당시 스위스는 13개 주로 구성된 연맹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도입된 이후 스위스에는 로마 가톨릭으로 남아 있는 주들과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주들 사이에 대립이 고조

1차 카펠 전쟁

그러던 중 1529년에 가톨릭 측에 포로로 잡힌 야곱 카이저(Jacob Kaiser)라는 프로테스탄트 설교자가 슈비츠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을 당하는 일이 발생

이것을 계기로제 1차카펠전쟁이 발생

이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압도적 우위에 있었지만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평화협정 체결

복음 설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할 것

외국으로부터 받는 일체의 군사적인 용병의 대가를 폐지할 것

용병 수당을 창설한 자와 분배한 자들을 처벌할 것

슈비츠는 카이저의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한 1천 길더의 비용을 부담할 것

2차 카펠 전쟁

1531년 가톨릭 측이 다시금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들에 대해 박해를 가하자 프로테스탄트 측은 가톨릭 지역에 대해 경제적 봉쇄조치를 취함

가톨릭 주들은 프로테스탄트 주들에게 곡식포도주 소금 철 등을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시작

1차 카펠 전쟁 때의 상황과는 달리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측의 전세가 열세

전쟁이 발발하자 관습에 따라 츠빙글리는 군목으로서 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카펠에 참여

전쟁의 한복판에서 군사들을 돌보던 츠빙글리는 15311011일 부상을 당해 전사. 그의 나이 47

츠빙글리의 시체는 네 토막으로 잘려 불태워졌다.

지금도 카펠에 있는 기념비에는 츠빙글리가 죽을 때 남겼다는 말너희가 나의 몸을 죽일 수는 있으나 나의 영혼은 죽일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 부처 (Martin Bucer)의 말처럼 참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조국의 구원만을 바란개혁자이자 애국자였다

 

츠빙글리가 남긴 유산

우리는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 다시 말하면 취리히의 츠빙글리와 제네바의 칼뱅에게서 전해져오는 유산을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 전통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개혁교회 전통과 신학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명해야 할 사람이 바로 츠빙글리이다.

츠빙글리는 칼뱅보다 25년이나 먼저 태어나 스위스 종교개혁의 성격을 결정한 개혁자, 애국자,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였다.

개혁주의 전통의 아버지로서 츠벙글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유산을 남겨 주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이라는 개혁교회의 표어는 바로 츠빙글리에게서 시작되었다.

츠빙글리에게서 종교개혁의 본질은 하나님 외의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에게 한 조각의 마음이라도 빼앗기지 않는 것이었다.

츠빙글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마음을 다른 것에게 빼앗기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보았다.

둘째로, 성서에 대한 강조이다

연속적인 성서 강해의 전통을 수립하고, 예언 모임을 조직하고, 성서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츠벙글리의 독창성이었다

성서는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심장이었다

셋째로, 개인의 경건보다 공통체의 삶을 더 강조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자기 구원의 확신에 대한 몸부림에서 출발했다면,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국민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개혁은 공동체의 삶과 도덕에 집중되었으며, 사회와 정치의 유기적인 구조들을 개혁하려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용감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개혁자였다.

그의 책 r주석의 마지막 문장은 그의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내가 말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그리스도의 나라와 양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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