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6(주일예배) 핵심5. 소망하는 예배 (요3:23~24) | 이기형목사 | 2021-12-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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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4:23절 개역개정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핵심5. 소망하는 예배(요 4:23) 교회와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가? 소요리문답 1번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예배이다. 우리가 교회의 건물을 예배당이라 부른다. 교회의 역할 중에 예배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다. 성도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무엇인가? (시 50:5)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성도는 예배자이다. 예배하지 않는 성도라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자라 하겠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 자기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우리가 여기 말씀에서 눈여겨 볼 단어가 있는데, 찾으신다는 단어이다. ‘찾다’라는 뜻을 모르실리 없지만, 사전적인 정의를 내려 보자면 “현재 주변에 없는 것을 얻거나 사람을 만나려고 여기저기를 뒤지거나 살피다”라고 되어 있다. 많고 흔하면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데, 찾는다는 것은 많지 않기에, 귀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우리는 예배자들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적다고 생각하실 수 있다. 그러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귀할수록 가짜가 많다. 싸구려 상품은 가짜가 없지만, 명품은 가짜가 많다. 가짜는 겉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만큼 똑같다. 그러니 속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짜는 핵심이 빠져 있다. 앙꼬없는 찐빵이라는 말이다. 가짜를 만드는 것은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쉽게 가치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배가 교회와 성도의 최고의 가치인데, 그렇게 귀하기에 가짜도 많이 있을 수 있다. 사실, 교회에 모여 하는 일은 예배이다. 성도가 하는 일은 모두가 예배이다. 겉으로는 예배인데, 하나님은 겉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과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대상 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그 마음과 중심으로 예배하고 있느냐고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없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예배를 못견뎌 하신다. 차라리 그 성전 문을 닫아 버리면 좋겠다고 하신다. 어떠한 예배가 변질되고 오염된 예배이며, 어떠한 예배가 합당한 예배인가?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오염된 예배는 인본주의 예배, 현세기복적인 예배라 하겠고, 합당한 예배는 소망하는 예배라 하겠다. 그럼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가? 살펴보려 한다. 오늘은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세워가는 하늘가족교회 다섯 번째 핵심가치, 소망하는 예배이다. 1. 깨어진 세상에서 오염된 예배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로 인해 깨지고 상한 세상이다.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피조 세계가 허무에 굴복하고 탄식하는 세상이다. 이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되심 앞에 예배하는가?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거나 인생인 자기가 주인되려 한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예배하기가 쉬운가? 아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이 펼쳐지는 전쟁터가 예배의 현장이 아닌가? 사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예배를 막아선다. 변질된 예배를 3가지로 찾아볼 수 있겠다. 1) 기복주의 예배 오늘날 자본주의 번영신학으로 인해 예배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했는데, 이들은 가나안의 풍요와 다산의 신이다.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예배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황금이 우상이 되었다. 암튼 성공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도 그렇게 생각한다. 실패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가 아니라 성공과 형통이 기준이 되어 버린 것이다. 2) 이기주의 예배 (편리주의 예배)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이 말한대로 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요즘같은 시대에 무슨 예배를 1시간을 넘기는가? 요즘같은 코로나 시대에 꼭 교회에 가야 하는가? 쉽고 편하게 예배하려고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게 드려야지 내가 하고 싶은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시 29: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무조건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받으실거라 생각하심 안된다. 나답과 아비후, 홉니와 비느하스, 이들은 예배를 멸시하다가 심판을 받은 자들이다. 3) 이원론적 예배 성속 이원론은 거룩과 세속을 장소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예배당 안에 있으면 거룩하고, 세상에 나가면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원론이다. 교회 안에서는 예배자인데,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간다. 이러한 현세기복적인 예배의 소망과 기대는 무엇인가? 예배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만족과 기쁨이다.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하고 성공하는 것이다. 2.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치 말라 하신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은 지나간다. 영원한게 아니라 사라진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는 불타서 사라질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망할 나라에, 망할 회사에 투자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소망은 베드로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초점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하느냐가 아니라, 그 너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다. 그래서 잠시 지나갈 이 세상에 급급하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의 유업을 소망한다. 세상이 전부인 사람은 세상에서 누려야 하지만, 우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순간이고 지극히 일부이기에 영원한 나라를 위해 세상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그 예배는 천상의 예배를 미리 맛보며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는 예배이다.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끝나지만 천상에서도 계속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배이다. 예배를 즐겨하지 않는 자가 천국에 적응할 수 있을까? 그 반대일 수 있는데, 하늘의 예배를 잠시라도 맛본다면 그는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될 것이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고서 그는 세상에 내려갈 것이 아니라 여기 살자고 제안한다. 우리의 예배가 하늘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그런 예배가 되기를 축복한다. 3. 삶의 예배자로 오늘을 살아간다. 하나님 나라 천상의 예배를 소망하면서 살아간다면 현실 도피가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을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임한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을 안다면 여전히 세상에 속해 살아갈 수는 없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 그 간격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시민인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것이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통치)를 선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높여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사명을 위해 여러분을 삶의 자리에 보내신다. 이원론적 예배자를 넘어 내가 살아가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예배자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한다. 소망하는 예배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깨지고 망가진 세상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주시는 복음의 능력으로 삶의 예배자로 살아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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