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하늘가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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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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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5(주) 확신과 의심(고전 13:9-12)
운영자 2025.10.7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3 : 9 - 12 | 개역개정

  •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2025년 10월 5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251005(주일예배) 확신과 의심(고전 13:9-12) Summary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다른 어떤 죄보다 더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이라는 죄입니다. 확신은 우리의 일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입니다. 확신은 관용을 좀 먹는 치명적인 적입니다.” 영화 콘클라베에서 로렌스 추기경은 그렇게 강론합니다. “신념을 가진 사람이 가장 무섭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진실을 알 생각이 없다.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신념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이건 니체의 말이라는데 어느 정도 공감이 됩니다. ‘내가 봤으니까 내가 알고 체험했으니까’ 정확하다고 확신을 갖지만, 그게 사실(Fact)일지라도 진실(Truth)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건 일부분이니까요. 또 다른 면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야가 나를 넘어서 조금 넓어질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요?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확신은 오류의 가능성이 너무 많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담아내는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야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맞춘다면 그나마 하나님께 가까워질 것입니다. 확증편향으로 인한 분노와 척결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에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Outline 확신의 중요성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을 보면 아우라가 있다. 왠지 듬직하고 멋져 보인다. 반면 우유부단하고 망설이면서 확신이 없어 보인다면 신중함보다 ‘저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싶은 회의감이 들수 있다. 신앙에 있어서 확신은 더욱 중요하다. 믿는다는건 확신하는거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듣고 배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확신을 얻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있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기쁨에 참여할 것이다. 확신의 근거1. 나의 지식과 경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말씀드리려 하는데, 젓번째 길은 나의 지식과 체험이다. 일단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한다. 무턱대고 확신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지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체험, 경험이 있으면 더욱 확신할 수 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면, 내가 그렇게 체험했다면,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도 확신을 가질 수는 있다. 오늘날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정보의 홍수시대이기 때문이다. 레거시 미디어뿐 아니라 인터넷이나 유뷰트 같은 디지털 미디어까지 정말 지식과 정보는 차고 넘친다. 디지털 미디어는 똑똑해서 내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고(알고리즘) 내가 가만 있어도 스스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다보니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 확신이 확증편향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될 우려가 많이 있다. 내가 내 눈으로 보고 체험하긴 했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내 지식이 너무 분명하고 경험이 너무 강하다면 일부지만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 본문 9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 우리의 시야는 제한적이어서 전체를 볼 수는 없다. 우리의 시야는 현재는 볼 수 있지만 미래는 볼 수 없다. 9절에 나오는 예언은 맡겨진 말씀을 선포하는 것인데,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선포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맞지만, 전부일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장로교회로서 칼빈의 예정론을 성경적인 진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인다. 그런데 칼빈의 예정론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이들을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라 한다. 그럼 알미니안주의자는 비성경적인 이단인가? 1618년 도르트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지금까지 이단인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만, 알미니안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반된 개념처럼 보이지만 어느 한쪽만 취하면 이단이 된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부분만 이해할 뿐이다. 그렇기에 내가 바라보고 믿는 하나님을 전부인양 생각해선 안된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2가지 예로 든다. 11절은 어렸을 때와 장성했을 때의 차이이다. 어렸을 적에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한마디로 유치하다.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해진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 12절은 거울로 보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것의 차이이다. 당시 거울은 유리가 아니라 청동같은 금속에 광을 내서 만들었기에 희미하게 보여 주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실물이 아니라 희미한 부분이다. 여기 본문 표현대로 일부분이다. 희미한 정보를 가지고 일부분을 전부인양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보여진 것을 전부인양 착각하고 단정짓지는 않는가? 우리는 그의 전부를 보지 못하기에, 어떤 부분에 약점이 있지만 어떤 부분에 강점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바라보는 부분은 지극히 주관적인 일부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부분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지금 현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후에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기억하고 여지를 두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성도라 부르셨다. 주님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장차의 모습을 기대하셨다.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다. 지금 현재의 모습을 보신게 아니라 장차를 보셨다. 자기가 부분적으로 보고 알고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이 전부인양 진실인양 생각한다면 극단적이 된다. 오늘날 말세가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극단주의이다. 요즘 기독교에 나타나는 양상 가운데 하나가 극우 기독교이다. 그들은 영적 전쟁을 치루는 것으로 인식하고 타협없는 결연하고 비장한 각오를 다진다. 훗날 바울로 불리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랬다. 그가 예수믿는 사람을 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을 빙자한 인간들의 그릇된 열심이다. 이 모든 죄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부분을 전부로 착각한 자기 확신에서, 일부분일 수 밖에 없는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전부인양 절대화할 때 스스로의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확신의 근거2. 나의 지식과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 부분적일 수 밖에 없는 나의 지식과 경험이 확신의 근거가 될 때 얼마나 위험한지를 살펴 보았다. 그럼 참된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신앙의 확신을 말할 때 사람들은 ‘흔들리시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흔들리지 않는 나’에게 주목한다.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주목하기보다는 자기 마음의 상태를 주목한다. 하나님 그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강조점이 있으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확신의 정도가 달라진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전부인양 생각하게 되면 그야말로 이상한 하나님이 속출한다. 스스로는 믿음이라 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릇된 자기 확신이라 부른다. 믿음은 내가 얼만큼 강하게 확신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느냐에 달렸다. 희미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실물로 보듯이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날,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알 수 있는 날이 있다. 지금은 그 날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희미하게 볼 수 밖에 없고 일부분만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온전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그 날은 언젠가 다가오는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달려가야 할 날이기도 하다. 우리가 부분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온전하게 보려고 할 때 그 날은 이루어질 것이다. 확신의 근거를 나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으면 좋겠다. 나는 부분적으로 바라보고 부분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내 인식을 넘어서 광대하신 분이기에, 나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하시기를 바란다. 마무리 '현대 사회에서 문제의 근본 원인은 어리석은 자들과 광신도들은 확신에 차 있는 반면, 현명한 자들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지적에 공감할 수 있겠는가? 영화 콘클라베(Conclave)에서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의 강론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다른 어떤 죄보다 더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이라는 죄입니다. 확신은 우리의 일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입니다. 확신은 관용을 좀 먹는 치명적인 적입니다. 확신과 의심은 함께 갑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의심을 품지 않은 확신입니다. 의심하는 교황을, 그 의심을 통해 가톨릭 신앙이 살아 숨쉬는 신앙이 되게 하는 교황을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합시다.” 자기들이 옳다고 강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만 옳다는 오만과 극단적인 확신이야말로 일치와 관용의 걸림돌일 것이다. 의심은 ‘불신’이 아니다. 연약한 인간이 ‘이것이 진정 신의 뜻’인가를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확신이 저지를 수 있는 폭력을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인 셈이다. 진리에 대해서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갖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자기의 신념이나 확신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닐 가능성과 여지를 열어 두어야 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알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얼마나 자기 주장이 강한 시대인가. 신념을 진리인양 확신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디지털 정보의 홍수 속에서 확증 편향에 치우칠 위험이 다분하다. 진리에 대해서는 확신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확증편향과 혐오가 판을 치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에 대해서는 확신을 그리고 자기의 신념에 대해서는 가능성과 여지를 남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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