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하늘가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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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5(주) 남자답게 (고전 16:13) Father's day
운영자 2025.6.25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6 : 13 - 13 | 개역개정

  •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2025년 6월 15일 캘거리하늘가족교회 (gajok.onmam.com) 주일예배(bit.ly/gajok) 입니다.

250615(주일예배) 남자답게 (고전 16:13) Father's day 아버지의 남자다움 우리 부모님 세대는 아버지는 대부분 경제적인 책임을 홀로 졌고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았다. 가족을 등에 업은 아버지는 그 무게에 휘청거리며 살아왔지만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별을 품고 나갔다가 어둠을 짊어지고 녹초가 된 아버지는 엿가락처럼 늘어져 귀가했다. 시인 김현승은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고 통찰했다. 오늘날은 공동 육아, 공동 가사, 공동 경제 활동으로 아버지의 짐이 한결 가벼워진 듯 싶다. 어쩌면 점점 아버지의 존재는 잊혀지고 그 자리는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 아버지의 날에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한 구절로 아버지들을 축복하며 격려하려고 한다. ~답다는 말은 그 명사의 성질이나 특성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 모든 이들에게는 남자다움이 필요하지만, 특별히 남성들에게는 더욱 남자다움이 필요하겠다. 그럼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 마초(macho), 상남자, 짐승남, 요즘은 테토남이라는 말도 쓰는거 같다. 근육질의 터프가이를 떠올린다. 남자다움의 오해에서 비롯된 이런 생각들이 참된 남자다움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오늘날은 성정체성의 혼동으로 성역할과 성적인 신분이 모호해지면서 남성다움의 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남자다움이란 어떤 것인가? 1. 깨어 있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다. 잠들어 있으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잠들어 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잠들면 깨어날 수 있지만 죽으면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잠들기 쉬운 세상이다(눅 21:34). 방탕과 술취함 같은 향락 때문에, 혹은 생활의 염려같은 곤고함 때문에 잠들기 쉬울거라 경고하신다. 2가지인데, 피곤해서도 그렇고, 편해서도 그렇다. 잠들려 하거나 잠들어 있다면 만사를 귀찮아 한다. 소중한 것을 귀찮아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영혼의 가치와 진리를 찾으려는 탐구이다.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인데, 여기 잘 산다는 기준은 국민소득으로 혹은 연봉으로 가늠한다. 그게 자본주의이다. 살아있거나 깨어 있다는 것을 의식이 있다고 한다. 의식이 없다면 생명이 중대한 위험에 처한 것이다. 여러분은 의식이 있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의식은 인식하는 지각일 것이다. 그런데 사전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의식이 있다. 오감을 통해 지각하는 것을 넘어서 생각이 깨어 있는 것이다. 쉬운 예로 의식화 교육을 들 수 있는데, 무의식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며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믿음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신앙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요즘 나는 생각없이 의식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많이 한다.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고, 좋은게 좋은거라고 안주하는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신앙은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헌금 잘하고 봉사 잘하면 되는 것이 전부는 아닐거라 싶기 때문이다. 생각없이 의식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합리적인 생각이 이원론이다. 교회에서는 교회방식대로, 세상에서는 세상의 방식대로. 그러면 아무런 충돌이나 고민이 없다. 종교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는 깨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강조하신 말씀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특히 주님의 다시 오심과 관련하여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살아있다는 것은 의식이 있다는 것처럼,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역시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잠들기 쉬운 세상에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란다. 2.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다 깨어 있다면 의식이 있다면 다음에 할 일은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다. 깨어 있어도 흔들릴 수 있고 떠밀려 표류할 수도 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리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하면 흔들어댄다. 자연적인 이치가 아닌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믿음의 깃발을 내리면 된다. 하지만 그건 백기투항이다. 흔들리지 않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여기 말씀처럼 굳게 서는 것이다. 오뚜기가 흔들린다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무게 중심에 있다. 배가 파도에 흔들려도 떠밀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닻을 내렸기 때문이다. 의식이나 생각에서 그치지 말고, 무게 중심을 갖고 닻을 내려야 한다. 어디에? 주님 안에. 이것을 본문은 ‘믿음에 굳게 서서’ 라고 표현하고 있다.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이해되는 지식에 따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신 선하심을 신뢰한다. 조금 더 포커스를 좁혀보면, 그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선물이 성경이다. 성경을 붙들려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이 공적인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 주셨고 하나님의 택함받은 하늘가족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와의 관계가 믿음에 굳게 서는 현실적인 지혜이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렇다고 자기 의식이나 의지를 믿어선 안된다. 내가 깨어 있으려는 의지가 있어도 능력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거나 표류하기도 한다. 그래서 믿음에 굳게 서는 것, 확고하게 붙드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붙들고, 성경을 붙들라. 그 가시적으로 주신 것이 교회와 목회자들을 붙들라. 쎄이렌의 유혹에 대처하는 오딧세우스의 지혜는 자기의 의지를 믿지않고 돛대에 자신을 결박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의 의지로 교회를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도록 묶어 두시라. 그 시험의 때를 교회 안에서 견디면, 다시금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3. 강건한 것이다. 여기 강건하라는 헬라어는 문법적으로 수동태 명령형이다. 수동태는 피동적인, 그러니까 자기가 힘을 길러서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공급받은 능력을 말한다. 이 의미를 바울은 에베소서 6:10에서 정확히 표현하였는데.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진다는 것이다. 강건함은 무력이나 육체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이다. 연약한 인생이지만, 주안에서 강건한 능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마무리 (고전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남자답게 강건한 삶은 남성과 아버지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다.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실감하지 않던가. 우리는 쉽게 요동치고 방황하기도 하며, 될대로 되라고 좋은게 좋은거라고 방치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스스로 속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괜찮은 것처럼 살아간다. 아무 생각없이 의식도 없이 떠밀려 살아가는 삶이라면, 문제의식도 없고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잠든 것이다. 이제야말로, 지금이야말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롬 13:11). 다시금 믿음에 굳게 서시라. 여러분의 의지와 생각을 믿지말고 하나님 안에, 성경 안에 여러분을 두시라. 좀더 현실적인 조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여러분을 묶어 두시라.  

그렇게 강건한 하늘가족 아버지들, 그리고 온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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