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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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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27(주))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 4:7-11)
운영자 2025.4.29

[성경본문] 고린도후서4 : 7 - 11 | 개역개정

  •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7-11)

 

보배를 가진 질그릇 여러분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잘 아실 것이다. 여러분은 평강공주가 되고 싶은가, 바보 온달이 되고 싶은가? 대부분 바보 온달이 되고 싶은 것은 사람 잘 만나서 성공하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가진게 많아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려고 할건데, 그에게도 한계와 부족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보 온달을 우리가 읽은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 아닐까 싶다. 우리도 보배를 가진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질그릇 인생 본문은 우리 인생을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다. 질그릇은 쉽게 부서지고 깨지는 연약함을 의미한다. 정말 우리 인생은 깨지기 쉽다. 작은 충격에도 쉽게 금이 가거나 이가 나가기도 한다. 우리 각자도 유리같이 연약함을 기억하고, 함부러 말하고 상처를 주며 강압과 폭력으로 깨뜨리는 일이 없어야겠다. 본문에는 질그릇 인생이 겪는 역경과 고난을 4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 이 말은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는 뜻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답답할텐데 사방에서 죄어오면 숨막히지 않겠는가? 둘째는,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대적들이 포위하여 결코 움직일 틈이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뜻이다. 세 번째는, 박해를 받는다. 헬라어는 사냥하다는 뜻이 있는데 마치 사냥감처럼 쫓기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네 번째는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넉다운, KO를 당한 것처럼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전혀 와 닿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질그릇 인생이 아니라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인생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그렇게 곱디곱게 자랐다해도, 앞으로도 꽃길만 걸을 수 있을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거나, 답답한 일을 당하거나, 박해나 거꾸러뜨림을 당할 일이 없을까? 누구도 인생을 장담하거나 확신할 수가 없다. 가리지 않고 갑자기 찾아오는 재난 앞에 인생은 속수무책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책으로 보험을 든다. 인생의 역경을 이겨내고 빛나게 하는 것이 보험일까? 그 대책이 보험이겠는가? 오늘 성경은 보험이 아니라 보배를 소개하고 있다. 2. 참된 보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먼저 보배의 능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질그릇 인생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수 밖에 없지만, 보배를 담은 질그릇은 우겨쌈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방이라는 동서남북 앞뒤좌우 말고 열린 공간은 어디있을까? 하늘이다. 하늘에서 오는 자유함이다. 답답한 일이 없는 없는 것이 아니라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대책이 없으니 답답한데, 보배를 가진 사람은 대책을 갖고 있기에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배를 가진 질그릇은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 모두가 나의 대적이 되는거 같을 때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해 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그렇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 임마누엘 우리 주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보배를 가진 질그릇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 현대어 성경은 ‘얻어맞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려 나갑니다’라고 번역했다. 이 정도면 사람이 아니라 오뚜기 아닌가? 오뚝이같이 일으켜 세우는 중심 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그런가? 정말 그런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고단한 인생길을 가는데, 이런 자유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전천후 인생의 비결을 다음 구절에서 알려주고 있다. 3. 자유함이 있는 인생의 비결은 10절 말씀에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잘 이해가 안되실 수 있는데,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수의 죽음은 십자가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 더 나아가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에 못박히는 삶을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났는가? 무덤에서 사망에 매여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님은 사흘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그래서 오늘날 십자가는 저주의 형틀이 아니라 대속의 사랑이며 승리의 심볼이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질 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때, 쉽게 풀어 설명하면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믿고 받아들일 때, 그는 예수 부활의 생명과 권능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10절 말씀에 의하면 예수의 생명, 예수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의 몸에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가?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질 때이다. 곧 예수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에 동참한다. 예수의 부활은 연례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누려야 하는 기쁨이다. 그런데 그 기쁨은 감정적인 누림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결단,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에서 나온다. 11절도 비슷한 반복인데, 약간 뉴앙스가 다르다. 10절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개인의 의지적인 결단을 말씀하는 듯 하고, 11절은 죽음에 넘겨지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죽을거같은 상황에 두시는 까닭은 죽으라 하심이 아니다. 성황과 형편을 바라보면 속수무책이라 끝난 것처럼 보이는데 그때가 기회라는 것이다. 어떤 기회인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기회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우리를 통해 예수의 생명을 드러내려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역경과 고난은 예수 부활을 드러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가 아닌가? 부활의 진리는 오직 복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다만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뿐이고, 때로 원치않게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나타나게 하신다. 이것을 믿고 붙드는 자들마다 예수의 생명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될 줄 믿는다. 마무리 질그릇 같은 인생뿐 아니라 금그릇 은그릇 인생도 있다지만, 그릇은 그렇게 보여지는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참된 가치가 달라진다. 질그릇같이 연약하고 볼품 없어도, 보배를 담으면 보석함이 되는 것이다. 질그릇인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이 일어나고, 때로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 현실 앞에 맞닥뜨리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보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사방으로 포위되어 전후좌우 어디에도 길이 없을 때,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면 주께서 자유함을 주실 것이다. 머리를 싸매는 답답한 일을 당하지만, 나는 답이 없어도 주님은 답을 갖고 계시기에 걱정할거 없다. 박해를 당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기에 버려진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거꾸러뜨림을 당한다해도 나는 일어날 힘이 없지만 주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니 망하지 않는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 사흘 후 부활케 하는 십자가의 능력이 아닌가? 사랑하시는 하늘가족 여러분, 그래서 고난의 시간은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은 심히 큰 능력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게 하심이다. 어둠 가운데 빛이 더욱 빛나듯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도 위로도 사랑도 더욱 풍성할 것이다. 우리 안에 담아주신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기회로 삼아 주실 것이다. 

질그릇을 자랑하는 인생이 아니라 보배이신 예수로 인해 넉넉히 승리하며 영광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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